||<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000><-5><bgcolor=#FFFFFF><:>[[중의원|[[파일:shuugiin_logo.png|width=100px]]]] {{{#000000 '''[[일본|{{{#000000 일본}}}]] [[중의원|{{{#000000 중의원}}}]] ([[교토부 제4구|{{{#000000 교토 4구}}}]])'''}}}|| ||<width=30%><:> ''선거제도 개편'' ||<width=5%><:>→||<width=30%><:>'''제41~42대[br]노나카 히로무'''||<width=5%><:>→||<width=30%><:>'''제43대'''[br][[다나카 히데오]]|| [include(틀:역대 일본 내각관방장관)]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000><-5><bgcolor=#FFFFFF><:>[[국가공안위원회|[[파일:NPSC_logo.png|width=100px]]]] {{{#000000 '''[[일본|{{{#000000 일본}}}]] [[국가공안위원회|{{{#000000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 ||<width=30%><:>'''제55대'''[br]이시이 하지메||<width=5%><:>→||<width=30%><:>'''제56대[br]노나카 히로무'''||<width=5%><:>→||<width=30%><:>'''제57대'''[br]후카야 다카시|| [[파일:노나카 히로무.png]] 1925.10.20. ~ 2018.1.26. [목차] == 개요 == 野中広務. 1925년([[다이쇼]] 11년) 10월 20일에 태어난 [[일본]]의 [[정치인]]. [[교토부]] 출신이다. [[부라쿠민]]임에도 소노베정[* 현재는 난탄시로 흡수.] 정장, 교토부 부지사를 거쳐 [[중의원]] 의원이 되고, 마침내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 간사장 자리까지 오르는 등 한때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했으나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총리 자리를 두고 [[하시모토 류타로]], 후지이 다카오를 내세워 두 차례 대리전을 펼치고 전부 패하였다. 구 교토 2구가 지역구였으며, 소선거구제로 개편된 이후에는 [[교토부 제4구]]가 지역구였다. == 생애 == 1925년 [[교토부]] 난탄시에서 태어났다. 교토부립 소노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43년에 [[오사카시]]의 철도관리국에 취직했으며, 당시 [[사토 에이사쿠]]를 만났었다. 1945년 3월에 [[일본군]]에 입대하였고 일본이 패전하자 다시 철도관리국으로 돌아왔다. 그후 1951년에 소노베정의원, 교토부의원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1978년에는 교토부 부지사를 지내고 1983년 교토 지역구를 바탕으로 [[중의원]]에 등원한다. 1994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에서 처음으로 [[대신]] 직을 맡는데 보직은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이었다. 1998년엔 [[내각관방]]대신을 지내고 2000년엔 중의원 7선으로 자민당 간사장에 오른다. 노나카는 2001년 자민당 대표 선거에서 총리 후보중 하나로 꼽혔으나 고사하고 대신 [[하시모토 류타로]]를 밀었다. 그러나 하시모토 류타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돌풍에 밀려 패배한다. 2003년에 자민당 대표 선거에서 다시 자기가 밀던 후보인 후지이 다카오가 고이즈미에게 패배하자 정계 은퇴를 한다.~~지못미~~ 2009년부터는 리츠메이칸 대학교의 객원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2011년엔 자민당을 탈당했다. [[아소 타로]]가 자기 파벌의 회합 자리에서,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 총리 후보 중 하나였던 노나카 히로무를 비난하면서 한 발언이 "노나카 히로무 같은 부라쿠민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는 없다"였다고 한다. 격분한 노나카 히로무는 자민당 총무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総務大臣に予定されておる麻生政調会長。あなたは大勇会の会合で『野中のような部落出身者を日本の総理にはできないわなあ』とおっしゃった。そのことを、私は大勇会の三人のメンバーに確認しました。君のような人間がわが党の政策をやり、これから大臣ポストについていく。こんなことで人権啓発なんかできようはずがないんだ。私は絶対に許さん! >'''"장래의 총무대신[* [[일본 내각총리대신|총리대신]]과는 다르다. 이쪽은 [[일본 총무성]] 장관으로서 한국의 [[행정안전부장관]]에 해당한다.] 자리를 약속받은 아소 타로 정책조사회장(원내대표 격), 당신은 파벌 회합 자리에서 "노나카 히로무 같은 부라쿠민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는 없다" 라고 말했다. 나는 이 사실을 당시 회합에 참석한 의원 중 세 사람을 통해서 이미 확인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당의 정책을 담당하고, 잎으로 대신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앞으로 인권 계몽이 가능할 리가 없다. __[[극대노|나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__"''' [[https://ja.wikipedia.org/wiki/%E9%87%8E%E4%B8%AD%E5%BA%83%E5%8B%99#.E9.BA.BB.E7.94.9F.E5.A4.AA.E9.83.8E.E3.81.B8.E3.81.AE.E6.89.B9.E5.88.A4|우오즈미 아키라, <노나카 히로무 차별과 권력(野中広務 差別と権力)> 2003년 9월 11일]] 노나카는 부라쿠민 출신으로 정계를 입문했을때 자신이 부라쿠민 출신임을 밝히고 부락해방동맹 등의 사회운동과 거리 두기를 했다. 2003년에 [[아소 다로]]가 천한 [[부라쿠민|부락민]] 출신인 노나카가 총리를 해선 안 된다고 ~~중세식 신분차별~~차별을 한 적이 있다. 이에 노나카가 격분하여 아소 다로를 규탄했고, 노나카의 규탄에 아소 다로는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되어 아무 말도 못했고, 훗날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아소 다로]] 본인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으나, 몇몇 의원의 증언이나 허구한 날 망언을 일삼는 그의 성격상 실제로 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2018년 1월 26일 [[교토시]] 시모교구에서 향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https://mobile.twitter.com/tv_asahi_news/status/956813944223494144|*]] == 여담 == 노나카가 부라쿠민이어서 총리가 못되었다는 얘기가 한국 인터넷에 널리 퍼졌으나 사실이 아니다. 노나카는 자민당 대표 선거(총리 선거)에 나온 적도 없고, 노나카가 밀던 후보가 패배한 건 고이즈미의 개혁론이 먹혀들어서 그런 거다. 1999년 경 "노나카는 정치권에서야말로 거물 관방장관으로 높으신 분이지만, 동화사회에서 자신의 지위는 낮다. [[이노우에 잇세이]] 의원이나 우에다 다쿠미 전 의원이 훨씬 견고한 지반을 가지고 있다"고 괴소문이 나간 적이 있다(...) 노나카의 본가는 교토의 망간 광산으로 끌려온 조선인 징용자 가운데 탈출한 자들을 숨겨줬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노나카를 돌봐준 사람도 조선인 여성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부라쿠민]]과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차별받는 신세라는 공통점 때문에 [[동병상련]]을 느끼고 서로 협력하는 일이 잦았다. 때문에 노나카 일가가 한국인과 관련한 이런 훈훈한 일화가 있는 건 사실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부라쿠민 출신으로서 똑같이 차별받는 주제에 자기는 혈통상 그래도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인]]을 차별하고 다니는 병맛 나는 인간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노나카는 아래와 같이 말한 바 있다. >"[[한반도]]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학대받는 걸 '''몇 번이나 보아 왔다'''. 나에게는 (그 사람들에게) 매우 지독한 꼴을 당하게 했다는 죄악감이 있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불식시키고, 한반도와의 신뢰관계를 만들어두고 싶다." >「朝鮮半島から連れて来られた人たちが虐待を受けた姿を'''何度も見てきた'''。僕には大へんひどい目にあわせたという罪悪感がある。そういうものを我々が生きとる間に払拭して、朝鮮半島との信頼関係をつくっておきたいんや」 [[북한]]이나 [[중국]]에 대해서도 다른 일본 정치인보다 우호적인 편이다. [[납북 일본인]] 문제를 들어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인도적 차원의 문제라며 발언하기도 했다. 다만 [[북한]]을 방북했을 땐 이런 나라엔 다신 오고 싶지 않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위안부]]나 [[난징 대학살]]을 인정하며 [[센가쿠 열도]] 문제 등에 대해서도 중국 측을 배려하여 발언했다. 자민당 정치인 중에서 상당히 리버럴한 편이었다. 같은 자민당 소속인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1939-2016)[* [[민주당(일본)|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가토 고이치(加藤公一, 1964-)와는 다른 인물이다.]와 더불어 자민당 내 [[좌파]]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딱히 이상할 건 없는게, 오늘날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만 해도 [[좌파]] 성향 인사들이 대거 자민당에 가입하여 [[포괄정당]]으로서의 성향을 띄기도 했기 때문이다. 노나카 히로무는 이 시기에 정계에 몸 담았던 사람이었던지라, 그 영향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자민막부]] 소리가 나올 정도로 자민당의 정계에서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서, 독자적인 정당을 차려서 군소 정치인 취급받고 묻혀지느니, 차라리 집권 여당으로 들어가서 내부에서의 개혁을 이루자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도 [[한나라당]]의 리즈시절에는 이런 경향이 좀 있었다.]. 전쟁을 겪은 세대라 전쟁이나 일본의 보통국가화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편. 2009년엔 정치적으로 오랜 적이었던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인 [[아카하타]]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으며, 노나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일본 공산당 공식 SNS에서도 이 기사를 인용하며 애도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다나카 마키코]]에게 '동안(もなか)인지 배(おなか)인지'라고 노나카의 성씨(のなか)로 [[언어유희]]를 당했다. [[한신 타이거스]]의 팬이며 [[부부별성]]을 가능케 하는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분류:일본의 정치인]][[분류:일본의 시구정촌의회의원]][[분류:일본의 도도부현의회의원]][[분류:일본의 기초자치단체장]][[분류:일본 내각관방장관]][[분류:일본 총무대신]][[분류:일본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분류: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분류:제40대 일본 중의원 의원]][[분류:제41대 일본 중의원 의원]][[분류:제42대 일본 중의원 의원]][[분류:1925년 출생]][[분류:2018년 사망]][[분류:난탄시 출신 인물]][[분류:평화주의자]][[분류:일본의 진보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