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 align=right><bgcolor=white> [[파일:노기용(국회의원).jpg|width=200px]] || || 성명 ||노기용(盧企容) || || 이명 ||노학준(盧學俊) || || 호 ||우전(雨田) || || 생몰 ||[[1897년]] [[7월 2일]] ~ [[1975년]] [[9월 15일]] || || [[출생지]] ||[[경상남도]] 초계군 중방면 황정리[br](현 경상남도 [[합천군]] 적중면 황정리)[* [[노(성씨)#s-2.1|광주 노씨]] 집성촌이다.][[http://blog.daum.net/qhwnd128/16907626|#]] || || [[본관]] ||[[노(성씨)#s-2.1|광주 노씨]][* 광주군계 29세손 '''용(容)''' 희(喜) 렬(烈) 항렬.] || || 사망지 ||[[부산광역시]] || || 매장지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박곡재 || ||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 개요 == >''''일제 때 항시 권총을 휴대하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유자재로 출몰하여 일경(日警)을 괴롭혔던 대담무쌍한 투사(鬪士)'''' > - 《사진으로 본 국회20년》(1968)에 수록된 노기용 전 국회의원에 대한 인물평.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경찰공무원, 정치인.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 생애 == 1897년 경상남도 초계군 중방면(현 합천군 적중면) 황정리[* [[노(성씨)#s-2.1|광주 노씨]] 집성촌이다.][[http://blog.daum.net/qhwnd128/16907626|#]]에서 태어났다. [[경성부]]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중학교]]를 중퇴했다. 보성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대구의 [[3.1 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했다. 1920년 그는 [[송두환(독립운동가)|송두환]]·[[최윤동]]·[[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8414|김종철]](金鍾喆)·[[정두희]] 등이 주도·조직한 비밀결사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정두규]]·노원용(盧圓容)을 동지로 포섭하는 한편, 1921년 8∼9월 권총을 소지하고 [[경주시|경주]] 양북면의 최세림(崔世林)과 [[합천군|합천]] 덕곡면의 조성걸(趙性傑)의 집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펼쳤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23년 4월에 합천 초계면의 문재규(文載奎)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요구했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1923년 음력 6월에는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7961|이수영]](李遂榮)의 집에서 최윤동과 모임을 갖고 [[전라북도]] [[정읍시|정읍군]]에 소재한 [[보천교]] 본부를 습격, 교인들로부터 수금한 3만원을 탈취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백동희(白東熙)를 새로이 동지로 포섭하여 거사를 준비하였으며 그해 7월 노원용과 함께 군자금 수합을 위해 서울로 향하던 중 일제 경찰의 경계가 심하자 [[대전광역시|대전]]의 윤길수(尹吉洙)에게 권총을 보관시키고 있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3년 12월 26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1924년 4월 9일 예심이 종결되고 공판에 부쳐졌으나, 고문으로 인한 상처의 감정관계로 공판이 여러 번 연기되었다. 1924년 10월 16일 징역 10년을 구형받고,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총포화약류단속령 시행규칙 위반, 가택침입, 강도죄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http://w3devlabs.net/korea/archives/tag/%EB%85%B8%EA%B8%B0%EC%9A%A9|독립유공자 공훈록 및 공적조서]][[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2662|#]] 광복 후 1946년 [[미군정]] 때 경찰 [[경위(계급)|경위]]에 입직하여 1946년 2월 [[경감(계급)|경감]]으로 [[구미시|선산]]경찰서장, 1946년 5월 [[청송군|청송]]경찰서장, 1947년 2월 [[문경시|문경]]경찰서장, [[대구광역시|대구]]경찰서장, 1948년 4월 경상북도 경찰학교 교장 등을 지내고 그해 11월 [[총경]]으로 퇴직하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14&aid=0004165792|#]] 이후 1949년 경상남도 [[고성군(경상남도)|고성군]]수를 지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제31선거구([[합천군]] 갑)에 출마하였는데, 9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표가 많이 나뉘어져 23.81%(7,321표)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2대 국회에서 내무위원회 위원을 겸임하였다. 1952년 6월 [[6.25 전쟁]] 2주년 부산기념식장에서 발생한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에 [[김시현(독립 운동가)|김시현]], [[서상일]], [[백남훈]] 등과 함께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1954년 1월 최종적으로 공소 기각 판결을 받기도 하였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401310020920201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01-31&officeId=00020&pageNo=2&printNo=9473&publishType=00020|#]]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위 선거구에 또 다시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유봉순]]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낙선 이후부터 [[한의사]]에 종사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제7선거구([[부산광역시|부산시]] [[동구(부산)|동구]] 을)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1955년)|민주당]] [[오위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제40선거구([[합천군]] 을)에 출마하였는데, 무려 13명의 후보와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각축을 벌인 끝에 [[민주당(1955년)|민주당]] 정길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후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75년 9월 15일 부산광역시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상신리 박곡재에 매장되었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제31선거구([[합천군]] 갑구)) || [[무소속]] || '''7,321표 (23.81%)''' || '''당선''' || || || 1954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제31선거구) || [[민주국민당]] || 4,080표 (13.67%) || 낙선 (3위) || || || 1958 ||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제7선거구([[부산광역시|부산시]] [[동구(부산)|동구]] 을)) || 무소속 || 1,386표 (4.21%) || 낙선 (3위) || ||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제40선거구([[합천군]] 을)) || 무소속 || 2,468표 (7.02%) || 낙선 (8위) || ||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제2대 국회의원]][[분류:민주국민당 국회의원]][[분류:무소속 국회의원]][[분류:경찰공무원]][[분류:합천군 출신 인물]][[분류:광주 노씨]][[분류:1897년 출생]][[분류:1975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