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독립운동가, rd1=남정철(독립운동가))]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내부대신)] [include(틀:조선귀족)] ||<-2><table align=right><tablewidth=450><colbgcolor=#191919><colcolor=#FFF> [[조선귀족|'''{{{#ffffff 조선귀족 자작}}}''']][br]'''{{{+1 남정철}}}[br]南廷哲 | Nam Jung-chul'''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612428305720.png|width=100%]]}}} || 南廷哲 [[1840년]]([[헌종(조선)|헌종]] 6) [[4월 27일]] ~ [[1916년]] [[6월 30일]] [목차] ||<tablealign=left><table width=230><tablebordercolor=#292929>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WipeOut00_11_2021_080036.278000.jpg|width=100%]]}}} || [clearfix] == 개요 == [[조선]] 말기의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의령 남씨|의령]](宜寧)[* 22세손 종(鍾) '''정(廷)''' 항렬.], 자는 치상(穉祥), 호는 하산(霞山). 초명은 남상철(南商哲)인데, 생원시에 급제한 1865년부터 문과에 급제한 1882년 사이에 정철(廷哲)로 개명하였으며, 동생으로 남정필(南廷弼)[* 초명 남상필(南商弼). 1873년(고종 10) 식년시 생원시에 2등 2위로 급제하였으며[[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73_034843|#]] 1886년(고종 23) 정시 문과에 병과 8위로 급제하였다.[[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86_014459|#]]]이 있었다. == 생애 == 1840년 4월 27일 [[한성부]]에서 [[개국공신]] [[남재]]의 16대손인 남홍중(南弘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홍중은 1852년([[철종(조선)|철종]] 3) 식년시 생원시에 3등 23위로 급제하여[[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52_032612|#]] 남평현감을 지냈다.[[http://sillok.history.go.kr/id/wza_10406004_003|#]] 1865년([[고종황제|고종]] 2) 식년시 생원시에 3등 2위로 급제하였으며[[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65_033934|#]], 곧 [[음서]]로 정5품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에까지 올랐다. 1882년(고종 19) 10월 20일 증광시 문과에 병과 11위로 급제하였다.[[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82_014218|#]] 직후 정5품 [[홍문관]]교리(校理)에 제수된 것[[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19_11A_02A_00140_2004_098_XML|#]]을 시작으로, 정3품 [[성균관]]대사성·종2품 [[평안도]][[관찰사]]·종2품 [[사헌부]]대사헌·정3품 [[승정원]][[도승지]]·정2품의 [[형조판서]]·[[예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의 고위직을 지냈으며,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등으로 관제 개편이 이뤄지고 난 이후에도 1896년 함경북도 관찰사·의정부찬정, 1897년 내부대신 겸 군부대신, 1898년부터 중추원의관·홍문관학사·궁내부특진관·장례원경·시종원경·태의원경·홍문관특진관 등을 1907년 초까지 중복 역임하였다. 한편, 그는 본래 성리학자 출신으로 수구파였다. [[갑신정변]] 때 [[김윤식(조선)|김윤식]]과 함께 청군 출병을 요구해 개화파의 정변을 좌절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1896년 [[아관파천]] 때도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환궁을 앞장서서 교섭하기도 했었다. 심지어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와 총리대신 [[이완용]] 등에 의해 [[순종(대한제국)|순종]]에게 강제로 양위하였는데, 양위식이 있었던 19일 남정철은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23&docId=530999&categoryId=46623|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어[[http://sillok.history.go.kr/id/wza_14407019_004|#]] 왕실의 전례(典禮) 및 의식(儀式) 등에 대한 임금의 자문에 응해야 했던 직무상 양위식 집행에 참여해야 했음에도 불구, 당시 궁내부 대신 [[박영효]]·시종원경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23&docId=541680&categoryId=46623|이도재]](李道宰) 등과 함께 양위식 집행에 거부하여 불참했다가 21일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의 탄핵을 받고[[http://sillok.history.go.kr/id/wzb_10007021_003|#]] 다음날 22일 아침 고종 폐위 반대 투쟁을 주도한 교무과장 [[이갑]]과 시종무관 [[어담]], 고종 폐위 반대 투쟁에 참여한 군인들을 저지하지 못한 [[대한제국군 시위대]] 보병 제1연대 제3대대장 임재덕(林在德), 고종 폐위 반대 발언을 한 군무국장 겸 연성학교장 [[이희두]] 등과 함께 법부에 압송되어[[http://db.history.go.kr/id/gj_006_c11_070_220_050|#2]] 8월 22일에 곤장 80대를 맞았다.[[http://db.history.go.kr/id/gj_006_d01_010_190_020|#]] 그런데, 이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정적인 이완용에 협력하게 되었다. 그해 9월 3일 경효전(景孝殿)에서 열린 [[명성황후]]의 기신제(忌辰祭)에 참석하여 길들인 말 1필을 하사받고[[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A_A01_09A_03A_00050_2015_001_XML|#]] 정2품에서 종1품으로 품계가 올랐으며[[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A_A01_09A_03A_00160_2015_001_XML|#]], 이후 황실의 큰 행사에 제술관(製述官)으로 임명되어 참여하다가 190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910년 6월 10일 평화협회(平和協會) 발기총회에 회장으로 선임되었는데[[http://db.history.go.kr/id/gj_006_d04_060_070_010|#]], 평화협회는 [[일진회]]의 한일 병합 청원 찬성에 찬조하기 위해 설립된 추진단체였다. [[경술국치]] 직후에는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으면서 [[조선귀족]]이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wzc_10310007_001|#]] 1911년 [[귀비 엄씨]]가 사망하자 장례에 참여하였다. 1916년 6월 30일 사망하여 남작 작위는 아들 남장희(南章熙)[* 1877년(고종 14) ~ 1953. 1891년(고종 28) 정시 문과에 병과 16위로 급제하였다.[[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91_014866|#]]]가 습작하였다. 이로 인해 아들인 남장희와 함께 친일반민족행위자 목록에 등재되었다. == 여담 == 글씨를 잘 써서 [[덕수궁 대한문]] 현판을 직접쓰기도 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남정철은 내부 대신 자리를 노리고 당시 외부협판 [[김홍륙]]의 첩과 자신의 첩이 자매 관계를 맺게 해서 내부 대신 자리를 얻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 남정철의 첩이 '''김홍륙과 [[네토라레|정을 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알게 된 김홍륙의 첩은 남정철이 베푼 연회에 난입해서 남정철에게 욕을 퍼부으며 '첩 간수도 제대로 안 하고 남의 애정에 훼방이나 놓는 네가 그러고도 대신이냐'며 따졌고, 이로 인해 다른 손님들에게 제대로 망신당한 남정철은 다른 일을 핑계로 세 번이나 상소를 올려 내부 대신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http://db.history.go.kr/id/sa_001r_0020_0160_0060|#]] == 둘러보기 == [include(틀:수구파)] ---- * 관련 인물 * [[김윤식(조선)|김윤식]] * [[이도재]] * [[박영효]] * [[이희두]] * [[김홍륙]] [각주] [[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수작, 습작]][[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정치]][[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의령 남씨]][[분류:수구파]][[분류:1840년 출생]][[분류:1916년 사망]][[분류:조선귀족 남작]][[분류:형조판서]][[분류:예조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