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align=right><tablebgcolor=#ffffff><table width=450><tablebordercolor=#0047a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남궁억}}}[br]南宮檍'''}}}}}}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age/087/2014/07/16/214071500133_99_20140716003314.jpg|width=100%]]}}} || ||<|2><width=25%><bgcolor=#0047a0> {{{#ffffff '''출생'''}}} ||1863년 12월 27일 || ||한성부 종로방 정동 왜송골[br](現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정동)[[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21515|#]] || ||<|2><bgcolor=#0047a0> {{{#ffffff '''사망'''}}} ||1939년 4월 5일 (75세) || ||강원도 홍천군 || ||<bgcolor=#0047a0> {{{#ffffff '''본관'''}}} ||[[남궁(성씨)|함열 남궁씨]] || ||<bgcolor=#0047a0> {{{#ffffff '''자'''}}} ||치만(致萬) || ||<bgcolor=#0047a0> {{{#white '''호'''}}} ||한서(翰西) || ||<bgcolor=#0047a0> {{{#ffffff '''직업'''}}} ||독립운동가, 교육가, 사회운동가, 언론인 || ||<-2><bgcolor=#fff>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tablebgcolor=#fff><tablewidth=100%><bgcolor=#0047a0> {{{#fff '''부모'''}}} ||父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UV_6JOc_9999_031598&curSetPos=3&curSPos=2&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B|남궁영]](南宮泳), 母 덕수 이씨 || ||<bgcolor=#0047a0> {{{#fff '''배우자'''}}} ||양혜덕 || ||<bgcolor=#0047a0> {{{#fff '''자녀'''}}} ||딸 남궁숙경, 남궁자경[br]아들 [[남궁염]] || ||<bgcolor=#0047a0> {{{#fff '''학력'''}}} ||동문학(同文學) {{{-2 (수료)}}} || ||<bgcolor=#0047a0> {{{#fff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 생애 == 1884년 [[영어]] 학교인 동문학을 수료하였다. 이후 내아문 부주사, [[칠곡군|칠곡]]군수 등으로 일하였으며 1894년 내부토목국장으로 중용되어 한성부 [[종로(서울)|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 앞~[[숭례문|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고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을 세웠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에 관직을 사임하고 1896년 7월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1898년 9월 [[나수연]], [[유근]]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해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데 힘을 쏟았다. [[대한제국]]의 정치 체제를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개혁해 [[의회]]를 설립하고 대대적 개혁을 단행하려는 독립협회 운동 지도자로 활동하다 1898년 11월 익명서 사건에 연루되어 16명의 지도자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때 [[이승만]]이 [[배재학당]] 학생들을 이끌고 경무처와 평리원에서 [[밤샘]] 농성을 벌여 [[석방]]시켰다. 1905년 3월 [[고종(대한제국)|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군|성주]]군수로 부임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자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906년 2월 [[양양군|양양]]군수에 임명되자 애국 계몽 운동에 참가하였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이유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체결해 침략 정책을 강화하자 사임하고 애국 계몽 운동에 주력하였다. 1910년 8월 [[한일합방]] 이후 교육을 통한 구국 운동에 노력하여 1910년 10월 [[배화학당]] 교사가 되었다. 1918년 [[건강]]이 악화되자 [[강원도]] [[홍천군]]으로 내려갔으며 1919년 9월 모곡 학교를 설립하고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https://www.ajunews.com/view/20190624132128050|하지만 무궁화 보급 운동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남궁(성씨)|함열 남궁씨]] 집성촌이며 남궁억의 본적지이다.]에는 남궁억이 설립한 한서감리교회와 한서초등학교 등이 있으며 [[교회]] 옆에는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초등학교]] 뒷편에는 남궁억의 묘역이 있고 초등학교 주변에는 보기 힘든 무궁화 [[나무]]가 무리지어 있다. 1933년 11월 [[개신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 결사인 '십자당'을 조직해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간 투옥되었으며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남궁억의 외아들 [[남궁염]]은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활동을 돕고 재미 교민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뉴욕시|뉴욕]] 총영사로서 12년간 근무하며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 유족 위로, 강연회 개최, 구제물품 수송 등 여러 업무를 수행했다.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물러난 직후 사임했고 1961년 11월 29일 [[롱아일랜드]]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011년 대한민국 정부는 남궁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1863년 출생]][[분류:1939년 사망]][[분류:개화파]][[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중구(서울) 출신 인물]][[분류:함열 남궁씨]][[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독립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