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왕자/중종 ~ 고종)]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bgcolor=#3cb371> '''[[낙선군|{{{#fafad2 낙선군파의 역대 종주}}}]]''' || ||<width=30%> 낙선군가 역사 시작 || {{{+1 →}}} ||<width=30%><bgcolor=#3cb371> '''{{{#fafad2 1대 낙선군 이숙}}}''' || {{{+1 →}}} ||<width=30%> 2대 임양군 이환 || ||<-3><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94153e><colbgcolor=#94153e> {{{#gold '''조선 인조의 왕자'''[br]{{{+1 '''낙선군[br] 樂善君'''}}}}}} || ||<-2><width=30%> '''[[군호|{{{#gold 군호}}}]]''' ||낙선군(樂善君)[* 군호는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었던 낙안군(樂安郡)에서 유래했다.] || ||<-2> '''[[시호|{{{#gold 시호}}}]]''' ||정헌(靖憲) || ||<-2> '''[[본관|{{{#gold 본관}}}]]''' ||[[전주 이씨|전주]](全州) || ||<-2> '''[[이름|{{{#gold 이름}}}]]''' ||숙(潚) || ||<-2> '''{{{#gold 부왕}}}''' ||[[인조|조선 인조]] || ||<-2> '''{{{#gold 생모}}}''' ||[[귀인 조씨]](貴人 趙氏) || ||<-2> '''{{{#gold 부인}}}''' ||동원군부인 [[강릉 김씨]](江陵 金氏) || ||<-2> '''{{{#gold 자녀}}}''' ||1남[* 후술하겠지만 [[양자(가족)|양자]]이다.] || ||<-2> '''{{{#gold 묘소}}}'''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궁평리 || ||<|2> '''{{{#gold 생몰[br]기간}}}''' ||<colbgcolor=#94153e> '''[[음력|{{{#gold 음력}}}]]''' ||[[1641년]] [[11월 7일]] ~ [[1695년]] [[3월 14일]] || || '''[[태양력|{{{#gold 양력}}}]]''' ||[[1641년]] [[12월 9일]] ~ [[1695년]] [[4월 26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인조]]의 막내아들이자[* 적자, 서자 상관없이 막내아들이라는 뜻.] [[귀인 조씨]]의 둘째 아들이고, [[소현세자]], [[효종(조선)|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의 이복 동생이며 [[숭선군]]의 동복 동생이다. 동복 누나 효명옹주는 권신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의 아내이다. == 생애 == [[한성부]] [[창경궁]] 별실에서 태어났다. 8살 때인 1648년에 '낙선군(崇善君)'으로 봉해졌다. 책봉받은 지 불과 1년 뒤인 1649년에 아버지 [[인조]]를 잃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낙선군의 이복 형 [[효종(조선)|효종]]은, 비록 낙선군의 생모 [[귀인 조씨]]와 사이가 나빴지만 그 소생인 이복 동생들에 대해서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것을 가엾게 여겨 재위 초반에는 노비를 150명씩 내려주는 등 잘 대해줬다. 그러나 2년 뒤인 1651년에 [[김자점]]의 옥사에 엮여 어머니 [[귀인 조씨]]는 [[사약]]을 받고 죽었다. 낙선군과 그 형제들에 대해 유배를 보내라는 이야기가 많았으나 처음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해서 작위만 삭탈하는 정도로 끝냈다. 그러나 대신들이 [[상소]]를 계속 올려 1년 뒤인 1652년에 낙선군과 형 [[숭선군]]은 [[강화도]] [[교동도|교동]]으로 귀양을 갔다. 거기서 소현세자의 3남 [[경안군]]과 함께 지냈고 3년 뒤엔 누나 효명옹주도 교동으로 와서 같이 살았다. 그러나 홍우원, [[송시열]], 이경여 등 신하들이 무고함을 호소하여 4년 뒤인 1656년 16세 때에 풀려난 뒤 관작이 복구되었다. 이후 낙선군은 편복 차림[* 便服. 평상시에 간편하게 입는 옷.]으로 궁궐에 출입했다가 탄핵을 받았으나 [[현종(조선)|현종]]의 배려로 그냥 넘어갔으며 --지금으로 치면 [[청바지]]에 [[니트]] 입고 [[청와대]]에 출근한 격--, [[현종(조선)|현종]]이 [[온양행궁|온양 온천]]으로 행차할 때 같이 가기도 하고, 조카손자인 [[숙종(조선)|숙종]]이 [[왕세자]] 시절 행했던 관례에 종친 자격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1673년에는 행중추부판사(行中樞府判事)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당쟁|당파 싸움]]에 휩쓸려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행동을 굉장히 신중하게 하여 행실에 대한 평판이 좋았다. 또한 현명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숙종(조선)|숙종]] 대에는 [[종친]]의 중요한 어른으로 우대받았다. == 사망 == 1695년 3월 14일 향년 5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궁평리인 경기도 양주군 청송면에 있다.[* 궁평초등학교 바로 왼편 언덕 소나무 숲에 있다.] 부인 동원군부인 김씨와 합장한 형태로, 1986년 4월 10일 연천군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받았다. 다만 2000년대 후반에 한동안 방치 상태로 놓여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http://yonchon.com/2.0/bbs/board.php?bo_table=news_media&wr_id=680|관련 기사)]]. || [[파일:낙선군 묘.jpg|width=100%]] || || 낙선군의 묘. || 1772년([[영조]] 48년)에 그의 위패를 [[수진궁]](壽進宮)에 두었다. == 가족과 후손 == [[강릉 김씨]] 김득원의 딸 동원군부인 김씨와 혼인했다. 슬하에 자녀는 없었고 측실도 두지 않아서 [[선조(조선)|선조]]의 9남 [[경창군]]의 장손인 청평군 이천(淸平君 李洤)의 차남 임양군 이환(臨陽君 李桓)[* 처음에 작위를 받았을 때 이름은 서원군(西原君)이었다.][* 개봉한 이름인 임양은 강릉의 별호인 임영(臨瀛)에서 유래한 것이다,]을 양자로 들였다. 임양군은 딸 셋과 해풍군 이수, 해릉군 이관, 해은군 이당, 이렇게 3남[* 봉작명은 임양군의 부인의 본관인 해주(海州)에서 따온 것이다.]을 낳았고 해풍군은 2남, 해릉군은 1남, 그리고 해은군은 5남을 낳아 대를 이으면서 현재의 전주 이씨 낙선군파를 형성하고 있다. === 역대 종주(宗主) === 1. 낙선군 이숙(樂善君 李潚) 1. 임양군 이환(臨陽君 李桓): 낙선군파 1대 사손(嗣孫)[* 사손의 대수는 종주의 대수에서 1을 빼면 된다.] 1. 해풍군 이수(海豊君 李燧)[* 그의 둘째 아들인 여선군 이학(驪善君 李壆)이 1748년에 알 수 없는 모반에 휘말려 섬에 유배되고 후에 주살됨에 따라, 1755년 봉작명이 삭탈되었다가 1864년 신원(伸寃), 3년 뒤인 1867년에 복작(復爵)되었다.] 1. 여천군 이증(驪川君 李增)[* 사촌형제들과 함께 연좌제로 걸려서 봉작명이 삭탈되었다가 후에 신원 및 복작되었다.] 1. 이소구(李韶九)[* [[인흥군(1604)|인흥군]]의 6대손으로, 1873년에 고종의 명으로 사후양자로 들어갔다.] 1. 이종영(李鍾永) 1. 이건중(李楗重)[* 초명은 이구인(李龜仁)] 1. 이기응(李紀應) 1. 이재봉(李載鳳)[* 이기응의 동생 이홍응의 아들이다. 이기응에게는 첩에게서 난 자식밖에 없었으므로 정실에서 난 양자로 들여왔다.] [[1900년]]에 편찬된 선원속보에 기초한 것이며, 최근에 만들어진 낙선군파 족보가 나왔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낙선군파가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이 가첩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크다. 선원속보가 편찬된 지 120년이 지난 현재 9대 종주의 증손자, 즉 'O주(柱)' 자 돌림을 쓰는 12대 종주가 이미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숭선군(1639), version=1, paragraph=2)] [[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서출]][[분류:1641년 출생]][[분류:169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