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전 체육부장관, rd1=김집(1926))] [include(틀:문묘 배향 18현)] |||| [[파일:305053_231397_3430.jpg]] [* 1636년 조선이 [[병자호란]] 패배 후 다수의 왕족과 사대부가 끌려갔다가 1642년 즈음에 다시 돌아왔는데, 이때 문신 유근과 김집이 [[김상헌(조선)|김상헌]]에게 쓴 편지이다. 김집의 편지는 좌측.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05053|출처]]] || ||<tablealign=center> '''성명''' ||<(> 김집(金集) || || '''본관''' ||<(> [[광산 김씨]] || || '''출생''' ||<(> [[1574년]] 음력 [[6월 6일]] [[조선]] [[한성부]] [[정릉동]] || || '''사망''' ||<(> [[1656년]] 음력 윤 [[5월 13일]] [[조선]] [[충청남도|충청도]] [[논산시|연산현]] || || '''국적''' ||<(> [[조선]] || || '''자''' ||<(> 사강(士剛) || || '''호''' ||<(> 신독재(愼獨齋), 신독(愼獨) || || '''시호''' ||<(> 문경(文敬) || [목차] == 개요 == [[한양]] 출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시호 문경(文敬). 아버지는 예학자[* [[이이(조선)|이이]], [[성혼]], [[송익필]] - [[김장생]] - 김집, [[김상헌(조선)|김상헌]], [[안방준]] -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로 이어지는 예학 외에도 [[정구(조선)|정구]] - [[장현광]] - [[허목]], [[윤휴]] 로 이어지는 또다른 예학이 영남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이 둘은 김집이 살던 시대로부터 한세대 뒤에 충돌하게 된다.] [[김장생]][* [[이이(조선)|이이]], [[성혼]], [[송익필]]의 학문을 계승하였다.](金長生)이며,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조대건(曺大乾)의 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서 [[성혼]], [[김장생]]의 문인. [[성혼]]의 문하에서 배우다가 나중에 아버지 [[김장생]]에게도 사사, 아버지 [[김장생]], 제자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등과 함께 기호 예학[* 영남 지방에는 정구 - 장현광 - 허목으로 이어지는 영남 예학이 따로 존재했다.]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하였으며,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등에게 학문을 전하여 기호 학파와 [[노론]], [[소론]] 양당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광해군 때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은퇴하였으며, 인조 반정 이후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효종(조선)|효종]] 때는 [[김상헌(조선)|김상헌]], [[안방준]]과 함께 국가 원로로 활동했고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서인]]과 기호학파의 종통으로 [[노론]]과 [[소론]]의 마지막 공동 조상이다.[* 그의 제자 송시열과 송준길은 노론이 되고, [[윤선거]]는 윤선거를 거쳐 다시 그의 제자인 [[박세채]]와 [[윤증]](김집에게는 손제자가 된다.)이 소론의 영수가 된다.][* 안방준이 호남 학파로 갈라진 뒤, 기호 학파의 마지막 학문적 직계 조상이 된다. 사실 기호학파, 영남학파라는 개념은 20세기에 등장한 개념으로 조선시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 생애 == 김장생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대건(大乾)의 딸 창녕 조씨의 아들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학예에 뛰어나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나중에는 아버지 [[김장생]]에게 사사하였다.[* 김장생은 이이, 성혼, 송익필을 모두 사사했는데 송익필의 예학에 주로 치중하였다.] 1591년(선조 24년)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했으나, [[사림]] 집권 이후 묻혔던 사장학(詞章學, 시와 문장을 짓는 데 힘쓰는 학문)도 공부하였지만 사장학보다는 주로 경전 연구와 수양에 전념하였다. 1610년(광해군 2)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던 중 서숙부 2명이 [[칠서의 옥]]에 연루되어 죽자 은퇴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선대의 고향인 [[충청남도]] 연산으로 돌아갔다.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부여 현감과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냈고, 지평(持平)·집의 등을 지냈다. 그러나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고, 그 뒤 전라 도사·선공감첨정 등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사직하였다. 이후 학업에 전념하여 [[정홍명]][* 송강 [[정철]]의 아들이다.](鄭弘溟)과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고, [[윤선거]](尹宣擧) 등과는 상례에 대해 논하였다. 또한 아버지 김장생이 편찬한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정하고 편집하는 일에 전심전력하였다. [[인조]] 중기에 [[서인]] 중 공신 계열인 [[공서]]파(功西派)가 집권하자 사직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우부승지·공조 참의를 거쳐 공조 참판·예조 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나, 그때마다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사임하였다. 이에 태학의 유생들이 벼슬에 오래 머물도록 해달라는 소를 올리는 등 사람들에게 그의 덕망은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뒤에 문인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죽지 못하고 왕족의 종자 선복(宣卜)으로 변장하고 살아나온 일[* [[윤선거]]의 삼촌, 부인, 사촌, 김익겸(김집의 동생 김반의 아들.) 등 친구들, 원로 대신 김상용 등이 자살했다.]로 죄책감에 휩싸여서 방황하였으나 김집이 그를 다시 거두었다.[* 그뒤 윤선거는 과거나 출사를 단념하고 김집의 문하에서 학문 연마를 계속하다가 김집이 죽은 뒤에는 서실을 열고 후학 교육에 전념했다.] 자괴감에 빠진 [[윤선거]]를 위로하고 그를 학문의 길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김집의 다른 수제자인 [[송시열]]은 이를 못마땅히 여긴다.] 아버지 [[김장생]]이 죽자 아버지 [[김장생]]의 제자들 중 일부인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이유태]] 등이 다시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여 사사하였다.[* 이후 김장생을 노선생, 김집을 선생이라 했다.] 이후 아버지 [[김장생]]의 뒤를 이어 [[서인]][[산림]]파[* 공서파가 이귀,김류 사후 [[원두표]]의 [[원당(붕당)|원당]]과 김자점의 [[낙당]]으로 갈라지자 산림파는 원당과 낙당에 대해 [[산당]]으로 분류되었다.]의 영수가 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그에게 대임(大任)을 맡겨달라는 김상헌(金尙憲)의 특별 추천을 [[효종(조선)|효종]]이 받아들여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효종이 즉위하였으나 공서 [[김자점]](金自點) 등의 영향력이 강하자 출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김자점]]이 파직되자, [[김상헌(조선)|김상헌]](金尙憲), [[안방준]] 등과 함께 등용되었다. 예조 참판·대사헌을 거쳐 이조 판서가 되었고 산당의 영수가 되어 정치적 역할과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안방준]]과 함께 [[대동법]]을 강하게 반대했는데, 대동법 시행을 극력 주장하는 한당의 영수 [[김육]](金堉)과 대립하여 백성의 충의 발현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김육이 일방적으로 당한 것처럼 그려지는 것과 달리, [[김육]] 역시 김집과 산림의 비판에 못지 않게 김육 역시 완강하게 저항하며 김집을 노골적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서 후에 송시열은 대동법에 찬성하는쪽으로 돌아서면서 '스승님이 대동법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런것 같다'는 평을 내린다.] 이후 효종과 함께 북벌(北伐)을 계획하였다. 그때 실각한 김자점이 이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자, 청나라의 문책으로 사태가 시끄럽게 되므로 관직에서 사임하였다. 그 뒤 대사헌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중추부판사로 재임 중 사망하였다. 만년에 예학(禮學)을 대성하여 그와 접하는 자는 예에 통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아버지와 더불어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성하였다. [[1653년]](효종 4년) 좌참찬을 거쳐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효종의 각별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혀 경전 연구와 수양에 힘썼다. 아버지 김장생과 함께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하였으며,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학문을 전하여 기호학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율곡 이이]](李珥)와 [[성혼]]의 학문과 [[송익필]]의 예학(禮學), 그리고 아버지 [[김장생]]의 이기설과 학문, 기호 학파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그 학문을 [[송시열]]과 [[송준길]], [[윤선거]][* 윤선거를 통해 윤증, 박세채 등에게로도 학통이 이어진다.]에게 전해주어 기호 학파와 [[노론]], [[소론]]계로 학문이 계승된다. 저서로는 《신독재유고》, 《의례문해속》등이 있다. 사후 [[1883년]](고종 20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효종 묘정 등에 배향되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 때 가서 [[문묘]]에 배향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옥천의 창주서원(滄州書院), 황해도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여담 == [[노론]]과 [[소론]]의 학문적 조상인 덕에 그들은 김집을 성인(聖人)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남인]]과 [[북인]]에서 계속 딴지를 걸고 발목을 잡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런데 [[노론]]에서만 밀던 [[송시열]]은 어떻게 [[정조(조선)|정조]]의 눈에 드는 바람에 송자(宋子)가 됐다.] [[동방 18현]][* 동국 18현이라고도 부른다.] 중 가장 늦은 [[고종(대한제국)|고종]] 때 가서야 [[문묘]]에 종사된 것 역시 [[남인]]과 [[북인]]들의 반대, 딴지 책동 때문이라는데... 사실 문묘 종사는 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몽주 같은 경우는 125년 걸렸고, 문묘 종사는 후대에 이루어진다. [[대동법]]에 반대하고 굉장히 엄숙한 성격때문에 [[꼰대]] 중의 상꼰대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 자신의 정실부인인 영의정 [[유홍]]의 딸이 적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적자를 보아서 후대를 이으라는 주변의 의견을 거부하고, 율곡 이이의 서녀였던 부실부인과 해로했다고 한다. 그렇게ㅠ해서 김집은 적자 대신 서자밖에 없었으나 [[송시열]]등이 조정에 간청하여 서자로 하여금 적자의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하게 됐다고 한다. [[분류:조선/인물]][[분류:동명이인/ㄱ]][[분류:1574년 출생]][[분류:1656년 사망]][[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광산 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