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국군/인물]] [include(틀: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include(틀:제2작전사령관)] ||||<table align=right><#030> {{{#ffffff '''김진호(金辰浩)'''}}} || |||| [[파일:external/image.kmib.co.kr/201412291743_61110008989686_1.jpg]] || ||||<#030> {{{#ffffff '''1941년 ~'''}}} || ||<#2e8b57> {{{#ffffff '''복무'''}}} ||<#8fbc8f> [[대한민국 육군]] || ||<#2e8b57> {{{#ffffff '''기간'''}}} ||<#8fbc8f> [[1964년]] ~ [[1999년]] || ||<#2e8b57> {{{#ffffff '''임관'''}}} ||<#8fbc8f> 학군 2기 || ||<#2e8b57> {{{#ffffff '''최종계급'''}}} ||<#8fbc8f> [[대장(계급)|대장]] || ||<#2e8b57> {{{#ffffff '''최종보직'''}}} ||<#8fbc8f> 합동참모의장 ||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2011031j0397_P2.jpg]] 퇴역 후 모습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군인. 2017년 8월부로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이다. [[대한민국 육군]] [[대장(계급)|대장]]이며, [[학생군사교육단|학군사관후보생]] 최초로 [[대한민국 국군]] 서열 1위인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에 취임했다. 합참의장 시절인 1999년 [[조성태]] 당시 국방장관과 함께 제1 연평해전 승리에 공헌했다. 퇴역 후인 2001~2004년에는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맡아서 [[개성공단]] 사업을 주도하였다. == 생애 == === 초기 === 1941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전농동에서 김삼봉과 심학실의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서울 전농동에서 살아온, 평범한 집안이었고, 비교적 유복한 가문이었으나, 1950년에 6.25를 맞이하여 온갖 고난을 겪었다. 그 당시 작은 형님이 국군을 죽이는 인민군이 싫다며 따발총의 실탄을 빼서 땅에 파묻어버려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1954년에 전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배재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57년에는 [[배재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그 시절에 공부를 그렇게까지 잘 하지는 못했다. 한때는 가출을 한 적도 있었고, 고교 시절에는 우열반을 나눠서 편성했는데, 열반에 배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암기과목 위주로 노력했다. 잠을 쫓는 약인 ‘카페나’라는 각성제까지 먹어가며 새벽 2시, 3시까지 공부하였다. 그 덕분에 1960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에 진학했다. 사학과에 진학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역사교사였던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그렇게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후 럭비선수로 크게 활약했다. 그리고 사학과 과대표 선거에도 출마했는데 낙마하였다. === 군인 초기 === 그 후 리더십과 순발력을 배우기 위해 [[학생군사교육단|ROTC]]에 지원하여 1964년에 2기로 임관했다. 첫 부임지는 [[강원도]] [[양구군]]의 [[제2보병사단]] 전방의 어느 소대였다. [[소대장]]의 임무를 다 하면서도 군에서 [[스케이트]] 선수로 활약했다. 징계를 면하기 위해 [[권투]] 선수로 나선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의무복무기간을 다 채우고 전역할 무렵에 당시 지휘관에게 "네가 제대하면 선수로 출전할 사람이 없지 않느냐"는 말을 듣고 전역명령을 취소시키며 그냥 군에 눌러 앉아 버렸다. 처음에는 [[대령]]까지 진급하는 게 목표였다. 그 뒤 1968년에는 [[베트남 전쟁]]에 군사장교로 참전하였다. 베트남에서 전투를 치르던 중 부친이 별세했지만, 모든 가족이 ‘흔들림 없이 군대에서 성실히 복무하라’는 의미에서 이를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귀국하여 이 사실을 알고 아버지께 드리려고 서울로 보냈던 라이터를 보며 통곡했다. [[제5보병사단]] [[대대장]]과 [[수도방위사령부|수경사]] [[제1경비단|제30경비단]] 부단장을 거쳐, 자신의 목표였던 대령까지 진급했다. 그러나 대령에 진급하고도 [[연대장]] 보직을 받지 못했다. 당시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제3공수특전여단 [[부여단장]]이었다. 이것이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견제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새벽 일찍 [[장세동]] [[대통령경호처|대통령경호실]]장에게 직접 전화로 따졌다.[* [[소령]]에서 [[대령]]까지 그와 세차례 같이 근무한 장세동은 그 즉시 하나회 핵심 관계자에게 “차라리 김진호를 전역시켜 버려라”고 강경한 어조로 항의했고, 그 덕분에 인사 불이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나회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당시 장세동이 도와준 덕분에 전방 지오피([[GOP]]) 담당 연대장으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지오피 연대장으로 근무할 때는 내무반 사고를 없애기 위해 전방 근무자를 세심하게 가려서 뽑는 한편 [[병영부조리]] 척결 및 선진병영문화에 온 힘을 쏟았다.[[http://www.newsgn.com/sub_read.html?uid=88224|관련 기사]] === 장군으로 === 그 뒤에는 계속 승승장구했다. 준장으로 진급한 뒤,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제37사단장의 자리에 부임하였다. 그리고 1991년에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 육본 소장 보직 중 [[요직]]으로 많은 중장, 대장들이 이 보직을 거쳐갔다.]으로 승진했고, 1993년에는 [[제11군단장]]을 역임했다. 1996년에는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제2작전사령관|제2군사령관]][* 주로 비육사 출신 대장에게 돌아가는 [[T/O]]다.]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1998년]] [[3월]]에는 제28대 합동참모본부 의장 겸 통합방위본부 본부장의 자리에 올랐다. 학군 출신으로는 전례 없는 승진이었다. 학군 1기인 [[박세환(군인)|박세환]]이 4성 장군으로 제2 작전사령관까지 올랐지만, 합참의장은 김진호가 처음이었다. 배재고등학교에서 배출한 2명의 4성 장군 중 한 명이다. 나머지 1명은 [[남재준]] 장군으로 [[육군사관학교]](25기)를 졸업했다. === 합참의장 시절 === 합참의장으로 재임하면서 동해안 잠수정 침투, 여수 반잠수정 격침, 제1차 연평해전 등 다수의 북한 군사도발에 맞섰다. 그때 유난히도 북한 측의 공세가 더 거셌던 것은 당시 [[김대중]] 정부의 대북화해 정책을 시험하고, 더 많은 지원을 얻기 위하여 북한이 [[화전양면전술]]을 썼기 때문이었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90166-00_01160516.jpg]] 1999년 제1차 연평해전 당시, 존 틸럴리 주한미군 사령관과의 회동 모습 다행히 북한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도발에 우리 상하급부대가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1999년 [[제1연평해전]]을 압승으로 마무리하였다. 당시 김진호는 북한 경비정의 NLL 도발 시 교전규칙에 따라 강력한 대응을 주문했다.[* 그 후 김진호는 자서전에서 제1차 연평해전 당시 북측 피해 규모에 대해 "우리의 통신정보기관에서 북한의 교신 내용을 파악한 바로는 1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강조했다. 종전에는 북한군 사상자가 수십명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 전역 이후 === [[1999년]] [[10월]]에 명예로운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하였다. 예편 후에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지냈다. [[김대중]] 정부와 [[김정일]] 정권 간의 남북경제협력 합의에 따라 [[개성공단]] 사업을 진두지휘하게 되었다. 그런데 2003년 4월 30일 개성공단 착공식을 한 뒤 북측에서 당초 80억원에 약속한 50년치 임차료를 갑자기 1200억원으로 올려달라고 했다. 근거도 없는 이런 요구를 들어주면 분양가가 3.3㎡당 10만원에서 40만원으로 급증, 조성 계획에 큰 차질이 발생할 판이었다. 이 상황에서 통일부는 북한과의 다른 사업까지 막혔다며 모든 책임을 미뤘고, 김진호는 계약내용을 바꿀 수 없다며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다른 정부 부처에서도 “1200억원이 무슨 큰돈이냐. 군 출신의 고집”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2003년 12월 22일에 [[노무현]] 대통령이 김진호 사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후 김진호는 리언 J 러포트 주한미군 사령관을 만나 개성공단의 전략적 중요성을 설명하고 “훌륭한 사업”이란 평가를 받아 미국 측 협조를 이끌어낸 뒤 북한과 협상하여 보상비 120억원에 출입국관리사무소 건축비 40억원 등 160억 원으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7대 대선에서는 자신과 같은 대학교 동창인 [[이명박]]을 지지하고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그리고 18대 대선에서는 [[박근혜]]를 지지했지만, [[최순실]] 사건이 터진 이후 19대 대선에서는 [[문재인]]을 지지하였고 지금은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적하였다. 2017년 8월 재향군인회장에 선출되었다. == 기타 == * 고려대학교에 입학할 당시 집안 사정상 등록금 마련이 어려웠다. 그래서 어머니가 동분서주하며 돈을 구하러 다녔고, 김진호는 풀이 죽어 혼자 어디를 갔다 오는데 저 멀리서 어머니가 손을 흔들며 그를 불렀다. “입학금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고려대학교에 진학했는데도 군대에 말뚝을 박겠다고 하니 어머니께서 당연히 엄청나게 반대하셨다. “내가 너를 고려대학 보낼 때 군인이 되라고 보낸 게 아니다”라고 하신 것. 하지만 그 후 그가 장군이 되었을 때에는 어머니께서 아주 좋아하셨다. 어머님이 위독해 급히 병원으로 모시고 가느라 그가 어머니를 등에 업고 허둥지둥 달리자,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장군 아들 등에 업히니 너무 기분이 좋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게 어머니와의 마지막 추억이 되었다. * 보병 제5사단 대대장 시절에는 실수를 연발하며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대대장급 이상 부부 동반 회식을 할 때, 무대에서 흥에 겨워 춤을 추다가 앞에 있는 사단장을 동료인 줄 알고 머리를 뒤에서 받는 장난을 쳐서 헌병대에 끌려갈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공관까지 따라가서 사죄를 한 끝에 사단장에게서 용서를 받아내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 원래는 [[김대중]]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김대중은 곧 빨갱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저런 공산주의자가 대통령이 되면 큰일인데’라고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2군 사령관 시절이던 1997년에 모교인 배재고등학교에서 열린 '자랑스런 배재인상' 행사에 갔다가, 배재중 출신인 [[김홍일(1948)|김홍일]]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김홍일이 "충성![* 자신이 아무리 필승이라고 경례하는 공군 출신이라 해도 상급자가 육군 출신이라면 무조건 충성으로 인사해야 한다.] 안녕하십니까! 김진호 장군님! 저는 공군 예비역 중위 출신 김홍일입니다! 장군님을 만나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안부 전해달라고 부탁받고 나왔습니다!"라고 씩씩하게 인사를 하자 깜짝 놀랐고, 오랜 편견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 아내는 고려대 사학과 출신 동갑내기이다. 캠퍼스 커플이라고 한다. * 대한민국국군예비역총연합(국군총연합)은 재향군인회 김진호 회장이 정치 활동 금지와 호국정신 함양 및 고취 조항 등을 위반했다며 사퇴할 것을 촉구했다. “김진호 회장의 정체성과 영혼 없는 행위는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법 제3조 정치활동의 금지와 제4조의 2에서 5항 호국정신의 함양 및 고취 조항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국가발전과 사회공익의 증진, 자유민주주의 수호 등의 조항 역시 위반했다며 김진호 회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아울러 “만약 물러가지 않으면 대한민국 예비역 군인들은 총 단결하여 김진호 회장을 끌어내리는데 총력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분류:1941년 출생]][[분류:동대문구 출신 인물]] [[분류:배재고등학교 출신]][[분류:고려대학교 출신]][[분류:한국토지공사 사장]]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김진호, version=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