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2020년에 놀면 뭐하니?에서 만들어진 김종민의 부캐, rd1=김종민/김지섭)] [include(틀:건국훈장 대통령장)] [include(틀:의열단)] ||<-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A%B9%80%EC%A7%80%EC%84%AD.gif]] || ||<-2> '''김지섭''' || ||<-2> 의열단 소속 || || 본관 ||[[김(성씨)|풍산 김씨]][* 27세 섭(燮) 항렬.] || ||<|2> 출생 ||[[1884년]] [[7월 21일]]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북면 오미동[br](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김(성씨)|풍산 김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김재봉(독립운동가)|김재봉]]·[[김만수(독립운동가)|김만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 ||[[1928년]] [[2월 20일]] (향년 43세) || || 추서 ||건국훈장 대통령장 ||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84년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 풍북면 오미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김(성씨)|풍산 김씨]] 집성촌이다.][[https://terms.naver.com/entry.nhn?cid=59011&docId=3572547&categoryId=59011|#]]에서 아버지 김병규(金秉奎)와 어머니 신천 강씨(信川康氏) 사이의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어서 [[일본어]]를 1달만에 익혀 상주공립보통학교(현 상주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독학으로 [[금산군|금산]]지방법원의 서기 겸 통역으로 일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모든 것을 뿌리친채 [[독립운동]]만을 할 것을 결심하여 [[베이징]]으로 건너가 [[의열단]]과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의열단에 가입해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 내의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찰서]], 재판소 등을 비롯한 [[일본 제국|일제]] 주요 관서를 폭파하기 위해 국내로 30여 개나 되는 [[폭탄]]의 반입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간신히 빠져나와 다시 [[상하이]]로 피신했다. 이후 의열단은 [[도쿄]]에서 열리는 [[일본]] 고관들이 대거 참석하는 '제국 의회'에 폭탄을 던지기로 계획했다. 이를 위해 의열단은 일본어에 능통하고 [[외모]]가 [[일본인]]과 닮은 김지섭을 일본으로 보냈다. 덧붙여서 김지섭이 의열단에 가입할 때 의열단원들 사이에서 "일제가 보낸 [[스파이]]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받았다고한다. 당연히 폭탄을 소지하고는 정상적인 경로로 일본에 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아편]]과 [[코카인]]을 [[밀수]]하는 일본인으로 가장했다고 한다.]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석탄]] 운반선 '덴조야마마루'를 통해 1923년 12월 21일 일본으로 [[밀항]]하게 되는데 12월 31일 덴조야마마루는 일본 [[후쿠오카현]] 야와타 제철소에 도착했다. 10일간 배 밑의 창고에서 지내며 하루에 [[주먹밥]] 1~2개로 끼니를 때우는 바람에 쇠약해진데다가 자금마저 녹록치 않아 [[교토]] 야와타시(市) 여관에서 1월 3일까지 머무르다가 도쿄로 출발했다. 그러나 도쿄로 출발하자마자 알게 된 사실은 '제국 의회'가 무기한 휴회되었다는 것. 밀항인 신분인데다가 폭탄을 소지하고 다니면 발각될 위험이 크고 '제국 의회'가 언제 다시 열리는지 [[일정]]이 전혀 없었기에 김지섭 의사는 목표를 [[황거]](천황의 궁성)로 바꾸게 된다. [[천황]]을 향해 의거하기로 한 이유는 1923년 [[관동 대지진/일본군의 학살|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들을 일본인들이 사냥하고 학살]]하는 모습에서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상황에서 충격을 받고 목숨바쳐 의거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24년 1월 5일 오후 거사를 계획하고 폭탄 3개를 품 속에 숨긴 채 천황이 사는 궁성 앞으로 가서 니주바시(二重橋) 건너편 정문 앞까지 가서 보초병들과 싸우고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탄[*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건너갈 때 밀항하느라 배 밑의 창고에서 숨어 있었다. 배 아래쪽이라 습한 창고에서 10일이나 있게 되는 바람에 폭탄이 [[습기]]를 먹게 되었기 때문에 불발탄이 났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나머지 2개는 안전핀도 안 뽑고 던졌다고 한다.][* 자료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대일본 제국의 모던 보이는 어떻게 [[한인애국단]] 제1호가 되었는가」의 저자 [[배경식]]이 기재한 당시 자료에 따르면 불발되었다고 알려진 [[수류탄]] 중에 안전핀을 뽑지도 않고 던진 것도 있다고 한다.(해당 각주는 5번 각주에서 안 터진 수류탄이 전부 습기를 먹은 탓이라고 서술되어 있을 때에 작성되었다)]이 2개씩이나 나와 결국 체포된다. 이후 검사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1927년 10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28년 2월 22일 옥 중에서 병사해 45세로 [[순국]]했다.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원수의 배 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촉도(蜀道, 중국 사천성 촉 지방으로 통하는 험난한 길)보다 험하고 태나라보다 더욱 무섭구나.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독립운동가 김지섭 의사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순국하기 전에 쓴 [[시]]이다. == 여담 == 엄청난 일을 해낸 독립운동가이지만 이름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유는 김지섭 의사의 의거를 일본 정부에서 묻었기 때문. 천황을 신성시하던 당시 일본에서 이런 습격은 [[고위층]] 수십 명의 옷을 벗길 수 있을 정도로 큰 사건이다.[* 1932년 이봉창이 [[쇼와 천황]]을 습격했을 때는 도심 한복판에서 폭탄이 터졌기 때문에 묻을 수 없었고 실제로 고위층 수십 명이 책임을 통감하며 옷을 벗었다.] 실제로도 사건 이후 내무차관 [[스카모토]]가 책임을 추궁당했으며 교토 지방의 경시총감과 경찰부장이 파면당하는 여파가 있었다. 결과론적으로 다른 의열단원들과는 다르게 천황 [[암살]] "미수"에 그쳤기 때문이다. 김지섭의 묘소는 처음에는 일제가 화장해버린 [[유골]]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매장했다가 이후 이장해서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에 있다. 현재 이 묘는 예천청주정씨재실(유형문화재 제315호), 대지재사(유형문화재 제173호)와 함께 '감자'라는 [[프로젝트]]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감자는 생전 김지섭의 [[별명]]으로 김지섭의 김지를 잘못 읽어 감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의열단원들은 모두 그를 감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세 다쓰지]]가 김지섭의 [[변호]]를 맡았다고 한다. 그는 "김지섭은 조선 민중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사람"이고 폭탄이 불발했으니 '불능범'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고 한다. [[역사]] 과목의 [[시험]]에서 비중있게 다룬 인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의열단원 김지섭을 무시하던 수강생들에게 [[최태성]] 강사가 [[https://youtu.be/7FpjoNg6tmc?t=1303|쓴소리를 했다]]. 덕분에 수강생들이 김지섭에 대하여 각인하게 되는 순기능도 있는 듯. 오죽하면 '최태성 강의 듣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저 썰이다.', '최태성 강의 듣고 김지섭 문제 틀리면 사람 아니다.'라든가... 사실 그 이전에 [[어쩌다 어른]]에서도 [[https://youtu.be/X8vh4TrEbuI|이 일화를 언급한 적이 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안동시 출신 인물]][[분류:풍산 김씨]][[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분류:1884년 출생]][[분류:1928년 사망]][[분류:의열단/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