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666666><tablewidth=500><tablebgcolor=#fff,#0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e0ffff 100%)" '''{{{+1 김주열}}}[br](金朱烈)'''}}}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static.naver.net/201403031854012131.jpg|width=100%]]}}} || ||<|2><bgcolor=#f5f5f5,#2d2f34><width=20%> '''출생''' ||[[1944년]] [[10월 7일]] || ||[[전라북도]] [[남원시|남원군]] 금지면 옹정리 || ||<|2><bgcolor=#f5f5f5,#2d2f34> '''사망''' ||[[1960년]] [[3월 15일]] (향년 15세) || ||[[경상남도]] [[마산시]] [[중앙동3가(창원)|중앙동3가]] 2-52 남산전기[* 줄여서 흔히 남전이라 불렸다. 김주열 사망 이듬해인 1961년 7월 [[한국전력]]으로 통합되었다.] 마산지점 앞[br](現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24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89725|#]] || ||<|2><bgcolor=#f5f5f5,#2d2f34> '''발견''' ||[[1960년]] [[4월 11일]] (실종 27일째)[* 시신 발견 소식이 알려지자 2차 마산의거(4월 11일)가 일어나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 ||[[경상남도]] [[마산시]] [[신포동1가]] 459 중앙부두 앞바다[* 現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안대로]] 220 ([[신포동1가]]) [[https://map.naver.com/v5/entry/place/1231226097?c=14311694.2651166,4191029.0975338,15,0,0,0,dh|창원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 [[https://map.kakao.com/?panoid=1026115111&pan=184.0&tilt=3.6&zoom=-3&map_type=TYPE_SKYVIEW&map_hybrid=true&map_attribute=ROADVIEW&urlX=857771&urlY=474400&urlLevel=3|카카오맵 로드뷰]] ] || ||<bgcolor=#f5f5f5,#2d2f34> '''사인''' ||'''3.15 의거 중 [[최루탄]] 피격에 의한 사망''' || ||<bgcolor=#f5f5f5,#2d2f34> '''학력''' ||[[남원시|남원]] 용정국민학교[* 現 금지동초등학교]{{{-1 (졸업)}}}[br] [[남원시|남원]] 금지중학교{{{-1 (졸업)}}}[br] [[마산상업고등학교]][* 現 [[마산용마고등학교]] ]{{{-1 (37회 / 명예졸업)}}}[* [[마산상업고등학교]]는 1995년 37회 졸업생으로 명예졸업장 추서. 당시 입학식이 4월초라 입학하기 전 사망.] || ||<bgcolor=#f5f5f5,#2d2f34> '''비고''' ||'''[[4.19 혁명]]의 주요 인물'''[br] || ||<bgcolor=#f5f5f5,#2d2f34> '''가족''' ||할아버지 김태종[br]아버지 김재계{{{-2 (?~1965)}}}, 어머니 권찬주{{{-2 (1920~1989)}}}[br] 큰누나 김영자{{{-2 (1936~ )}}}, 작은누나 김경자{{{-2 (1941~ )}}} [br]형 김광열{{{-2 (1942~1985)}}}, 남동생 김길열{{{-2 (1955~ )}}} || [목차] [clearfix] == 생애 == [[전라북도]] [[남원시|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서 아버지 김재계와 어머니 권찬주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넷째)으로 1944년 10월 7일에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태종은 해방의 혼란기에 면장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조합장을 지낸 천석꾼 부잣집이었다. 김주열이 어린 나이에 죽었으면서도 비교적 많은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은 이미 사진기와 전축을 가진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어머니 권씨는 [[경상남도]] [[함양군]] 사람으로 ‘함양댁’이라 불렸으며 이는 김주열의 [[영남]] 지방과의 인연을 암시하고 있다. 1956년 용지국민학교(현 금지동초등학교), 1960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여 마산상업고등학교(현 마산용마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어 진주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반대해 남원농업고등학교(현 남원용성고등학교)에 전학하였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몇 달을 다니지 않고 집에서 재수를 시작했다. 1년 후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져 가세가 서서히 기울자 김주열은 [[서울특별시|서울]]로 올라가 학비가 별로 들지 않는 [[한국교통대학교/의왕캠퍼스|철도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지만 실패하고 서울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다. 그러나 형 김광렬의 [[친구]]이며 형같이 따르던 하용웅의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면 [[은행원]]을 하는 것이 지름길이다."라는 권유를 받고 마산상업고등학교에 다시 원서를 내게 된다. 마산상업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고 돌아와 1960년 3월 14일로 예정된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형 김광렬과 함께 [[마산시|마산]]으로 갔으나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군중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꺼린 교육청에서 합격자 발표의 연기를 종용해서 3월 16일로 연기되어 있었다. 그래도 하용웅 [[선배]]의 담임 선생님을 통해 합격했음을 확인하였지만 당시에는 마산에서 남원까지 꼬박 하루가 걸려서 첫차를 타지 못하면 도중에서 유숙해야 했기 때문에 곧장 남원으로 귀향하지 못했다. 당시 김주열의 이모할머니는 열렬한 [[민주당]] 당원이였는데 [[자유당]]의 부정 선거로 인해 [[투표]] 통지표가 전달되지 않아 종일 울분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산에서의 부정 선거가 들통이 났고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자 이를 목격한 이모할머니가 집으로 와서 두 형제에게 시내에 나가보라고 한다. 이에 형제는 시위에 합류하게 되었으나 김주열은 돌아오지 않았다. ||<tablewidth=100%> [[파일:attachment/b0007832_11042133.jpg|width=100%]] || [[파일:attachment/b0007832_11044776.jpg|width=100%]]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EA%B9%80%EC%A3%BC%EC%97%B4%EA%B5%B0%EC%9D%98_%EC%8B%9C%EC%8B%A0.jpg|width=100%]] || || [[김주열]] 열사 || 시신이 발견된 장소 || 당시 시신의 모습 || 아들의 행방불명 소식을 들은 어머니 권씨는 마산으로 달려가 아들을 계속 찾아 헤멨으나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하고 4월 11일 남원으로 돌아온다. 이 와중에 별별 [[소문]]이 다 났는데 권씨는 이름모를 [[경찰관]]이 와서 "나도 김주열 군 또래 아우가 있답니다. 주열 군이 사라진게 남의 일 같지 않네요. 자세히 알면 확실히 가르쳐 드리는데 저도 모르겠고 소문으로 듣자하니 주열 군이 시위 도중 [[살해]]되어 시체가 [[경남도청]] 앞 호수에 버려졌다는 소문이 있더군요."라는 말을 하고 서둘러 사라진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권씨가 이걸 크게 외치면서 시위대가 경남도청 앞 [[호수]]를 경찰들과 같이 샅샅이 찾아봐도 없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권씨가 집으로 돌아가던 날 11시경 마산의 중앙 부두에 [[최루탄]]이 눈에 박힌 [[시신]]이 떠올랐다. [[사망]]한지 1달 가량 지났지만 당시 바닷물이 굉장히 차가워서 거의 [[냉동]] 상태였기 때문에 김주열의 시신은 [[부패]]되지 않았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82&aid=0000106268|링크 참조(시신 사진이니 주의)]] 김주열의 시신 사진은 당시 [[부산일보]] 기자 허종(1924~2008)이 찍어 [[특종]]으로 보도되었으며 시신이 김주열로 확인되자 용공 분자의 난동과 [[좌익]] 폭동으로 내몰린 마산 시민들의 울분이 다시 터져 올랐다.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고 이후 전개는 [[4.19 혁명/진행]]을 참조. == 기타 == * 김주열의 묘지는 3곳에 조성되어 있다. 실제 묘는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에 있으며 서울 4.19 민주 묘지와 마산 3.15 민주 묘지에 각각 가묘가 있다. * 중학교 시절 모 잡지를 통해서 알게 된 [[충청도]]의 한 고학생과 [[펜팔]]을 했는데 훗날 [[가톨릭]] [[신부(종교)|신부]]가 되어 [[꽃동네]]를 세운 [[오웅진]] 사도 요한이었다고 한다. *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국밥집을 하면서 조용히 살다가 1989년 [[별세]]했다. 큰형도 병에 걸려 43세로 [[요절]]했다. * 제11대, 제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김병오(정치인)|김병오]]의 [[당숙|당숙부]]이다. * 1995년 4월 11일 마산상업고등학교는 김주열에게 [[명예]] 졸업장을 추서했고 [[http://naver.me/xaGVBgqg|그 졸업장은 김주열 열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1987년 똑같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열사]]로 [[이한열]] 열사가 있다. 각각 [[4.19 혁명]]과 [[6.10 민주 항쟁]]의 원인이 된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나 이한열 열사는 [[머리]] 뒤쪽에 최루탄을 맞고 사망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 [[https://www.yna.co.kr/view/AKR20160315138800052|2016년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유기한 차량을 운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해 당시 정황을 상세하게 증언했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89725#dvOpinion|열사에게 사죄하고 묘지를 참배했다.]] [[분류:1944년 출생]][[분류:남원시 출신 인물]][[분류:1960년 사망]][[분류:무기에 죽은 인물]][[분류:열사]][[분류:4.19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