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align=center> [[파일:225px-탁영교지.jpg]] [* 김일손의 교지인 탁영교지(濯纓敎旨), 보기 드물게 금박을 섞어 만든 붉은 장지를 사용하였다.] || || '''성명''' ||김일손(金馹孫) || || '''본관''' ||[[김해 김씨]] || || '''출생''' ||[[1464년]] [[2월 13일]] ([[음력]] [[1월 7일]]) [br] [[조선]] [[경상북도|경상도]] [[청도군]] 현산현 토평리 백곡마을 || || '''사망''' ||[[1498년]] [[8월 14일]] ([[음력]] [[7월 27일]]) [br] [[조선]] [[한성부]] 광통방 || || '''국적''' ||[[조선]] || || '''자''' ||계운(季雲) || || '''호''' ||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 || || '''시호'''||문민(文愍)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시대의 [[문신]], [[학자]], [[정치인]], [[작가]]. [[김종직]]의 [[제자]]이다. 김일손은 1486년([[성종(조선)|성종]] 17년) 문과에서 2등을 하고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어 [[벼슬]]길에 나섰다. 김일손은 이후 [[홍문관]], [[승정원]], [[사간원]], [[사헌부]]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이는 조선 시대 [[엘리트]] 관원들이 역임하는 청요직(淸要職)이었다. == 조의제문과 무오사화 == 무오사화는 김일손이 성종 재위시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썼던 사초(史草)에서 비롯되었다. 이 일로 인해 김일손은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여러 학자들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이때 수많은 사람이 화를 입었는데 <[[연산군일기]]>는 이 과정을 생중계하듯이 낱낱이 적어서 후세에 전했다. 김일손은 일찍이 [[스승]]으로 섬긴 김종직을 닮아 사장(詞章)에 능했으며 당시 고관들의 부패와 불의를 규탄하였다. [[사림파]] 중의 1명으로 무오사화의 희생양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극돈]]의 평을 보면 인성과 능력 면에서는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이극돈이 김일손의 이조좌랑 추천을 거부했을 때 김일손을 평하기를 "사람이 경망스럽다"고 하였다.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세조(조선)|세조]]에 관한 [[소문]]을 확인 과정도 안 거치고 사초에 기록하였는데 "세조가 죽은 맏아들의 [[후궁]]과 수상한 사이였고 다른 후궁과도 찝적댔다."라는 위험 수위의 내용이었으며 그나마도 소문이었을뿐 확인된 것이 아니었다. 김일손이 세조에 대한 비판과 [[훈구파]]의 전횡을 사초에 올린 것은 분명 죽기를 각오하기 전에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일처리는 경솔했던 모양. 사관의 일이라는게 완전한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이었으므로 사적 감정을 담아 [[조의제문]]을 사초에 기록한 것은 사관의 책무에서 많이 벗어난 행동이었다. [[무오사화]] 문서는 파면 팔수록 김일손이 문제가 많다 쪽으로 결론이 나오는 모양새이다. 결국 이 일로 김일손은 [[거열형]]을 맞이했다. == 기타 == [[김해 김씨]]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고등 문관에 진출하는 일이 드물어지게 된다. [[기술]]직이나 [[중인]]층에서는 조선 후기에서도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그림]] 부문에서 단원 [[김홍도]] 등을 꼽을 수 있다. [[파일:한명회.E080.1994.CATV.XViD-SKYMAX.avi_001454414.jpg]] [[KBS]] [[왕과 비]]에서는 배우 [[이경영(1958)|이경영]]이 연기하였다. [[분류:조선/인물]][[분류:청도군 출신 인물]][[분류:김해 김씨]][[분류:1464년 출생]][[분류:149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