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 ||<-2><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47a0><tablewidth=450><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김윤경}}}'''[br]'''金允經'''}}}}}} || ||<-2> [[파일:김윤경(한글학자).jpg|width=100%]]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한결 || || '''본관''' ||[[경주 김씨]][* 계림군파 20세 '''경(經)''' 식(植) 항렬. 아버지 김정민(金正民)은 19세 정(正) 항렬.][[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0102|#]] || ||<|2> '''출생''' ||[[1894년]] [[6월 9일]][* [[http://db.history.go.kr/id/ia_1191_0929|김윤경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서는 개국 503년(1894년) 5월 28일로 기재하였다.] || ||[[경기도]] [[광주시|광주부]] 오포면 고잠리[br](현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고산리 고잠동)[*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https://www.korean.go.kr/nkview/nklife/1995_3/5_3.html|#]] || ||<|2> '''사망''' ||[[1969년]] [[2월 3일]] (향년 76세) || ||[[부산광역시|부산시]] [[동구(부산)|동구]] [[범일동]] 제일병원[br](현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 || '''묘소'''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광지원리 선영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한글학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김윤경은 1894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부 오포면 고잠리(현 광주시 오포읍 고산리 고잠동)에서 아버지 김정민(金正民)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강의법학교(西江懿法學校) 고등과를 수료하고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연희전문학교]] 문과, [[일본]] [[릿쿄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4세 때 상경하여 서강의법학교 고등과를 수료하고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하여 졸업한다. 이때 [[주시경]]으로부터 한글을 배워 국어 연구에 많은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후 4년여간 [[마산]] [[창신고등학교|창신학교]] 고등과 교사로 재직하였고 1917년 다시 상경하여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직전인 1921년 [[이병기(국문학자)|이병기]] 등과 함께 [[한글학회|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여 국문 연구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1922년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수양동우회]]의 전신인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 창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2년여간 [[배화여자고등학교|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교무주임과 훈육주임을 맡았다가 1926년 일본 릿쿄 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 졸업하였다. 귀국 후 배화여고보로 돌아가 계속 근무하는 한편 한글 연구에도 매진하였다. ||<tablealign=center> [[파일:김윤경(수양동우회).png|width=70%]] || || 1937년 8월 23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 1년여간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 7월 보석으로 출옥하였다. 이때문에 5년간 실직하여 1938년 1월『조선문자급어학사』를 출판하는 등 조용히 국문 연구에만 매진하였고 1942년 [[성신여자고등학교|성신가정여학교]]의 교사로 가까스로 복귀하였으나 그해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홍원군|홍원]]경찰서에 검거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 조선어학회 상무간사와 국어부활강사를 역임하는 한편, 연희전문학교 접수위원·이사직을 맡았고, 그해 10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한 이래 문학부장과 총장대리를 역임하였다. 1949년 그의 저작인 『조선문자급어학사』가 4대명저의 하나로 표창받았다. 1952년부터는 [[문교부]] 사상지도원 전문위원·국사편찬위원, [[6.25 전쟁]]으로 인한 교사복구추진위원, 대한교육심의위원, 교수요목개정심의회 국어위원, 문교부 교과용도서활자개량위원, 연희대학교 대학원장, 국어심의회 위원, 교육용도서편찬심의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1955년에는 학문의 업적과 교육가 및 한글운동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연희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학술원회원이 되었다. 1957년에는 기독교공로상·국어공로상을 받았다. 1962년에는 연세대학교 교수를 퇴임하였으나, 국어심의회 위원,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과 [[한양대학교]]의 강사를 지냈고, 학술문화발전 공헌공로상과 한글공로상을 받았다. 1963년에는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964년에는 전국국어국문학교수단 이사장의 일을 맡았고, 고희기념으로 『한결국어학논집』을 펴내는 등 평생을 한글 연구 및 후진 양성에 바쳤다. 이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창천동]]에 거주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969년 1월 28일 [[부산시|부산]]·[[울산]]지방 산업단지 교수시찰단의 일원으로 [[부산광역시|부산시]]에서 여행하던 도중 2월 2일 [[과로]]로 졸도하여 부산제일병원에 입원했으나[[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902040020920702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9-02-04&officeId=00020&pageNo=7&printNo=14558&publishType=00020|#]], 하루 뒤인 2월 3일 [[심근경색]]으로 별세하였다.[[https://news.joins.com/article/1186944|#]] 사후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현 광주시 [[남한산성면]] 광지원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1596|#]] == 여담 == *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에는 그의 호를 딴 '한결 하우스'가 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광주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김씨 계림군파]][[분류:1894년 출생]][[분류:1969년 사망]][[분류:언어학자]][[분류:연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릿쿄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