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47a0><tablewidth=450><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김양수}}}'''[br]'''金良洙'''}}}}}} || ||<-2> [[파일:external/rokps.or.kr/247.jpg|width=100%]]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약영(若瓔) || || '''본관''' ||[[광산 김씨]][*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 37세 수(洙) 항렬.] || ||<|2> '''출생''' ||[[1896년]] [[10월 10일]][* 음력 9월 4일.] || ||[[전라남도]] [[순천시|순천군]] 장평면 장명리[br](현 전라남도 [[순천시]] [[장천동(순천)|장천동]])[[http://db.history.go.kr/id/im_101_02291|#]] || || '''사망''' ||[[1969년]] [[9월 19일]] || || '''학력''' ||[[와세다대학]] {{{-2 (정치경제학 / 학사)}}}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정치인]], [[독립유공자]]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김양수는 1896년 10월 10일 전라남도 순천군 장평면 장명리(현 순천시 장천동)에서 아버지 김영묵(金永默)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iokr&logNo=221579991534&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와 [[영국]] [[런던 대학교]]에서 수학한 바 있다. 이후 귀국하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하였고 1923년부터 기독교 관련 서적을 출판·판매하는 조선기독교창문사(朝鮮基督敎彰文社)[* 1939년경 창문인쇄(彰文印刷)로 상호를 변경하였다.]에 감사로 취임하여 1942년까지 감사로 있었다[* 미국 유학 시기 및 투옥된 시기 제외][[http://db.history.go.kr/id/hs_001_1923_08_14_2740|#]][[http://db.history.go.kr/id/hs_001_1942_09_14_15810|#2]]. 1925년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열린 범태평양회의에 [[서재필]]·~~[[김활란]]·[[신흥우]]~~ 등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 성명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과 한국에서의 만행을 폭로, 규탄하며, 독립운동에의 지원을 전세계에 호소하였다. 1926년~1927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삼일신보사 주필로 있었으며, 그 동안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반제동맹회의(世界反帝國同盟會議)에 참석하기도 했다. 1931년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대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만났으며, 특히 [[김두봉]]과 교류하면서 한글운동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이후 조선으로 귀국, 1934년 [[김도연(1894)|김도연]]과 함께 조선흥업주식회사(朝鮮興業株式會社)[* 겉으로는 하나의 회사를 가장했으나,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1&itemId=hdsr&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0&levelId=hdsr_009_0030_0010_0010#hdsr_009_0030_0010_0086_|참조]] 주석 68번을 보면, [[조선어학회]]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를 창립하여 이사를 역임하였다. 1942년 9월 당시 이 회사에는 김양수·[[신현모]]·[[서민호]]·박창서(朴彰緖) 및 [[최순주]]·[[이인]]·김광수(金光洙)·등이 각각 이사와 감사로 취임해 있었으며[* 1941년 11월에는 [[이인]] 대신 설원식(薛元植)이 감사에 취임해 있었다.[[http://db.history.go.kr/id/hs_001_1941_11_14_8680|#]]] 그밖에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4446|장현식]]도 재정 지원에 참여하는 등 일본과 미국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인사들로 구성되었는데[[http://www.breaknews.com/521138|#]][* 다만, 박창서(朴彰緖)와 [[최순주]] 등은 일제강점기 말에 친일행적이 있는 인물들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대다수가 [[조선어학회]] 관련 인사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실제로 이 회사는 실상 [[조선어학회]]였다. 김양수는 표면적으로 회사를 경영하면서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특히 재정적 지원에 주력하였다. 그 밖에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주식회사 조선제사(朝鮮製絲)에 김종철(金鍾哲)[*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불구속으로 심문받은 사람들 중 한 명이며, 공판에 회부되지는 않았다.]·김도연과 함께 감사로 있었고[[http://db.history.go.kr/id/hs_001_1935_04_07_0270|#]][[http://db.history.go.kr/id/hs_001_1939_03_07_1660|#2]], 1939년부터 1942년까지 보인광업(輔仁鑛業) 이사로 재직하였다[* 1939년 당시 [[허정(정치인)|허정]](당시 허성수)가 이사지배인으로 있었으며[[http://db.history.go.kr/id/hs_001_1939_03_13_1250|#]], 1941년에는 허정이 상무이사에, [[조병옥]]이 이사 직임을 맡고 있었다[[http://db.history.go.kr/id/hs_001_1941_11_13_0970|#]].][[http://db.history.go.kr/id/hs_001_1939_03_13_1250|#]][[http://db.history.go.kr/id/hs_001_1942_09_13_1710|#2]]. 또 1939년 합동산업(合同産業) 감사[[http://db.history.go.kr/id/hs_001_1939_03_13_1380|#]], 1941년 김도연과 함께 합동산업 이사로 재직하였다[* 당시 [[허정(정치인)|허정]](허성수)는 상무이사로 있었다.][[http://db.history.go.kr/id/hs_001_1941_11_13_1090|#]]. 그러다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위로 기소되었다가 같이 기소된 53명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http://db.history.go.kr/id/su_012_1938_09_03_0220|#]][* 당시 [[신흥우]]·[[유억겸]]·[[윤치영]]·[[안재홍]]·[[이갑성]]·[[오화영]]·[[정춘수]]·[[최두선]]·[[김준연]]·[[최현배]]·[[허정(정치인)|허정]]·[[윤치호]]·[[이기붕]]·[[서민호]]·[[신석구]]·[[장덕수]]·[[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5898|이강래]] 등 총 55명이 검거되었으며, [[불기소처분]]을 받은 백남칠(白南七)을 제외한 54명은 [[http://ojsfile.ohmynews.com/PHT_IMG_FILE/2019/0214/IE002457343_PHT.jpg|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2400원의 국방헌금을 지불하고서야 [[기소유예]]로 석방될 수 있었다. 위 사람들 중 신흥우·유억겸·윤치영·정춘수·장덕수 등은 이후 실질적으로 변절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전향하지는 않았으며 윗 문단에서처럼 표면적으로 실업가 노릇을 하면서 조선어 편찬 사업에 계속 매진하였다. 그 후 1942년 10월 22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윤병호(尹炳浩)·서승효(徐承孝)·장현식(張鉉植)·[[이인]]·[[이은상(시인)|이은상]]·정인섭·[[안재홍]]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후 2년 3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 순천군수를 역임하는 한편, 전라남도 [[순천시|순천]][[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이승만]]을 총재로 하는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0275|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재무부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순천군 지부장, [[한국민주당]] 중앙위원·상무위원 겸 순천군당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순천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황두연(정치인)|황두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전라남도 순천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국민회]] [[황두연(정치인)|황평연]]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윤형남]]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5년 [[민주당(1955년)|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민주당 전라남도당 위원장이 되었다. 1956년에는 순천시 매곡동에 순일염색소(順日染色所)를 창립하여 경영을 시작했으며[[http://db.history.go.kr/id/hs_003_1956_01_18_9860|#]], 1958년 민주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 6월 원자력원[* 原子力院. 1959년 1월 발족한 대한민국 최초의 원자력 담당 정부 기관으로 1967년 3월에 원자력청으로 개편되었으나, 1973년 폐지되고 [[과학기술처]] 산하 원자력국으로 개편되었다.[[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_%EC%9B%90%EC%9E%90%EB%A0%A5%EC%B2%AD|위키백과]] 이후 2011년 10월 당시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원자력안전국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었으나, 폐지되었고 관련 인력 및 그 업무는 [[원자력안전위원회]]로 이관되었다.[[http://www.law.go.kr/LSW/lsRvsRsnListP.do;jsessionid=aMKAvjMwJb0A78f-nz+NIot1.LSW5?lsId=010682&chrClsCd=010102|#]]]장에 임명되었다. 1963년 [[신정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90년 정부에서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선거 이력 == ||<tablealign=center>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전남 제10선거구([[순천시|순천군]] 갑)) || [[한국민주당]] || 11,508표 (41.46%) || 낙선 (2위) || ||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제4선거구(순천시)) || [[민주국민당(1949년)|민주국민당]] || '''9,927표 (47.06%)''' || '''당선''' || || || 1954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제4선거구) || [[민주국민당(1949년)|민주국민당]] || 2,882표 (13.16%) || 낙선 (5위) || ||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순천시 출신 인물]][[분류:광산 김씨]][[분류:1896년 출생]][[분류:1969년 사망]][[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제2대 국회의원]][[분류:민주국민당 국회의원]][[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와세다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