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광주 김씨]][[분류:덕천시 출신 인물]][[분류:1900년 출생]][[분류:198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리츠메이칸대학 출신]] ||||<table align=right><bgcolor=white><:>[[파일:김승문.jpg|width=300px]] || || 성명 ||김승문(金勝文) || || 본관 ||[[김(성씨)|광주 김씨]][* 수해공파 23세손.][[https://news.joins.com/article/2034683|#]] || || 생몰 ||[[1900년]][* [[http://db.history.go.kr/id/im_101_21145|대한민국인물연감]]에는 1901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7월 17일]] ~ [[1984년]] [[4월 5일]] || || [[출생지]] ||[[평안남도]] [[덕천군]] 금성면 금성리[* [[김(성씨)|광주 김씨]] 집성촌이다.][* 구한말 덕천군 금성방 금성리 → 1896년 덕천군 금성면 금성리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덕천군 성양면 금성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덕천군 금성리 → 1982년 덕천군 덕천읍.][br](현 평안남도 [[덕천시]] 신흥동)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김승문은 1900년 7월 17일 평안남도 덕천군 금성면 금성리(현 덕천시 신흥동)에서 아버지 김봉규(金鳳奎)와 어머니 [[진주 강씨]] 강건규(姜建奎) 사이의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같은 학교 학생 400여명을 이끌고 [[평양직할시|평양부]] [[숭실대학교|숭실학당]] 운동장에서 일어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학교로부터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1920년 2월 그는 [[만주]]에 있는 대한독립단 단장 [[조맹선]]의 지령을 받고 국내에 비밀리에 파견된 박승엽(朴承燁)[*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승엽]]과 동명이인이다.]과 상의하여 [[덕천시|덕천]] 지역에 대한독립단의 지단(支團)을 조직하였다. 이때 그는 서기장의 직책을 맡고 지단장 [[정진원]], 부단장 [[정계록]], 재무감 [[정붕익]], 통신부장 [[이종현(정치인)|이종현]] 등과 함께 독립사상의 고취·무장대원에 대한 지원·군자금 모집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5월에는 대한독립단 단원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의 지시를 받고 김창문(金昌文)·김봉준(金鳳俊) 등으로부터 300엔을 모금하여 지단에 전달하는 등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같은 달 10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본]] [[교토]]로 유학하여 [[리츠메이칸대학]] 전문부 경제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28년 9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판매부 서기를 시작으로 경리부장과 광고부장을 거쳐 1937년 11월 도쿄지국장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책임을 지고 물러난 [[송진우]] 전 사장으로부터 "지금 일본에는 우리의 [[대사관]]이 없으므로 지국장(支局長)인 당신이 대사 역할까지 겸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도쿄지국장으로서 [[재일동포]]들의 고충을 대변하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파일:김승문(동아일보).jpg|width=200]] || 동아일보사 재직 당시 모습 || 이후 영업국차장 등을 지내다가 1940년 8월 동아일보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자 송진우 등과 함께 투옥되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 거주하였다. 1945년 12월 1일 동아일보가 복간되자 재입사하여 영업국장 겸 발행인으로 근무하였으며 1947년 2월 발행인 직을 사퇴하고 [[취체역]]에 취임하였다. 1949년 3월에는 영업국장 직에서 물러나 잠시 [[농림부장관]] [[이종현(정치인)|이종현]]의 [[비서실장]](이사관)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이듬해인 1950년 3월 상무취체역에 취임하였으나 곧 [[6.25 전쟁]]이 발발하여 실질적인 근무기간은 길지 않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5월 동아일보 창업주 [[인촌 김성수]]가 제2대 [[대한민국 부통령]]에 취임하자 그의 비서관 및 비서실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http://dongne.donga.com/2018/10/30/15-%EB%8F%99%EC%95%84%EC%9D%BC%EB%B3%B4-%EC%82%AC%EB%9E%8C%EB%93%A4-%EA%B9%80%EC%8A%B9%EB%AC%B8/|#]] 1954년에는 [[화신그룹|화신산업주식회사]]의 상무이사에 취임하였으며 1966년 7월 30일 동아일보 취체역 직에서 [[정년퇴직]]하고 [[화신그룹]] 계열의 화신산업주식회사, 흥한화학섬유주식회사, 흥한방적주식회사 등의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재직하였으며, [[박흥식]]이 재단이사장으로 있던 재단법인 흥한재단에 상무이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밖에 자선당제약주식회사에서 이사 직을 지내기도 했다.[[http://db.history.go.kr/id/im_101_21145|#]] 이후 [[관악구]] [[신림동]]에 거주하였으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자문위원을 지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고, 1984년 4월 5일 별세하였다.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