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47a0><tablewidth=450><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김성일}}}'''[br]'''金成一'''}}}}}} || ||<-2> [[파일:김성일(철산 독립운동가).png|width=400]]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아명''' ||김성필(金成弼) || || '''본관''' ||[[김해 김씨]] || ||<|2> '''출생''' ||[[1897년]][* [[http://db.history.go.kr/id/im_101_10647|1939년 소화사상통제사자료]]에는 1902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4월 14일]] || ||[[평안북도]] [[철산군]] 고성면 동부동[* 구한말 철산군 고성면 동부동 → 1918년 철산군 철산면 동부동 → 1949년 철산군 철산면 동부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철산군 철산읍.][br](현 평안북도 철산군 철산읍) || || '''사망''' ||[[1968년]]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김성일(金成一)은 1897년 4월 14일 평안북도 철산군 고성면 동부동(현 철산군 철산읍)에서 태어났다. 1911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3, 4년간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 고학하였다. 1916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펑톈]]에서 독립의용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1920년경 [[용천군]] 읍동면 사악동(현 피현군 양책노동자구)으로 이주하였다. 1920년 10월 26일경 용천군에서 [[박운죽]]의 권유로 대한독립보합단(大韓獨立普合團)에 가입하였고, 같은 달 28일경 그에게서 폭탄 두 개와 군자금 모집 영수증 용지 및 경고문 등을 받아 보관하는 등 단원들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같은 해 11월 7일경에는 [[박운석]]·[[박초식]]·[[박운죽]] 등과 용천군 읍동면 건룡동·동산동에서 군자금을 모집했고, 그리고 12월 9일경 읍동면 사악동에서 재차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후 출자자를 만나 정미소를 경영하기 시작했으나, 곧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1921년 4월 25일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폭발물취체령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했으나, 같은 해 6월 2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서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중국]] [[상하이]]로 이주하여 상업에 종사했는데, 이때 [[김구]]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1932년 4월 [[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 [[윤봉길]] 의사와 함께 체포되어 4개월간 고문을 받았고, 1933년 봄 일제로부터 퇴거명령을 받아 귀국하였다. 이후 만주로 다시 건너가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7년 9월 [[베이징]]으로 이주하여 동직문(東直門) 서중가(西中街)[* 현 중국 베이징시 둥청(東城)구 둥즈먼(東直門) 밖에 위치.]에 거주하면서 진흥공사(震興公司) 경리로 근무했다.[[http://db.history.go.kr/id/im_101_10647|#]] [[8.15 광복]] 후에는 귀국하여 [[서울특별시]]와 [[충청남도]] [[아산시|아산군]] 온양면 등지에 거주하였으며, 1968년 별세하였다. 201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여담 == 김성일은 만주·[[내몽골]] 일대를 전전하며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이 태어난 곳의 지명을 이름으로 지어줬다. 장남은 [[베이징]]에서 태어나 이름이 김북경(金北京)[* [[잉글랜드]] [[런던]] 최초의 한인교회를 설립했다.]이며, 차남은 장충동에서 태어나 김장충(金奬忠)[* [[명지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를 지냈다고 한다.]으로, 3남은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현 [[아산시]] [[온양동]])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김온양(金溫陽)으로 지었다. 또 딸들의 이름 역시 [[내몽골 자치구]]의 카이루(開魯)현[* 현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 퉁랴오(通遼)시 카이루(開魯)현.]과 퉁랴오(通遼)시의 이름을 따서 각각 '김개로(金開魯)'·'김통료(金通遼)로 지었으며, 막내 딸의 경우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김상해(金上海)'로 지었다고 한다.[[https://www.etoday.co.kr/news/view/1081172|#]] 이중 막내 아들 김온양의 차남, 즉 손자 중 한 명이 배우 [[김지석(배우)|김지석]](金知碩)[* 본명은 김보석(金寶石).]이다. 차남 김장충의 아들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김런던(金런던, London Kim)'이라고 하며, 김지석의 큰형은 출생지가 [[신사동(강남)|신사동]]이어서 본명이 '김신사(金新沙)'였는데, 세 살 때 김반석(金盤石)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김지석의 경우 [[부활절]]에 태어나 이름이 '김부활(金復活)'이 될 뻔 했으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평범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27/2015022700805.html|#]]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철산군 출신 인물]][[분류:김해 김씨]][[분류:1897년 출생]][[분류:1968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