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 해병대사령관)] ||<-2><tablealign=right><bgcolor=#dcdcdc> {{{+3 '''김두찬'''}}}[br]金斗燦 || ||<-2> [[파일:김두찬장군.jpg]] || ||<-2> 1919년 3월 8일 ~ 2011년 12월 30일[br][[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승호리[br](현 [[황해북도]] [[승호군]])[[http://w3devlabs.net/korea/archives/13668|#]] || || 1946 ||[[조선해안경비대]] 소위 임관|| || 1950 ||[[대한민국 해병대]] 정보참모|| || 1954 ||제1해병연대 연대장|| || 1960 ||[[해병대 제1사단|제1해병사단]] 사단장|| || 1961 ||[[대한민국 해병대]] 부사령관|| || 1962 ||제5대 해병대사령관||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군인]], [[학살자]]. 본관은 [[김해 김씨|김해]](金海).[[https://news.joins.com/article/1611008|#]] 일제강점기 당시 김택달(金澤達)이라는 이명을 쓰기도 했다. == 일생 == [[1919년]] [[3월 8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승호리(현 [[황해북도]] [[승호군]])에서 태어났다.[[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진학하는 등 엘리트코스를 밟았지만 [[1936년]] [[신사참배]] 거부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첫 항일운동 경력을 남겼다. 1943년에는 겸이포제련소의 용광로 폭파계획을 세우다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병대 창설 멤버들 다수가 [[간도특설대]], [[일본 해군|일본 해군 육전대]] 출신임을 상기하면, 김두찬의 항일운동 경력은 특기할만한 부분. [[광복]] 후 [[육군사관학교]] 1기로 입교했고 도중에 해군으로 전입하여 [[대한민국 해병대]]의 창설멤버가 되었다. [[제주 4.3사건]]이 벌어지고 이후 해병대가 제주도 계엄임무로 투입되자, 당시 정보참모 신분이던 김두찬은 [[예비검속]] 대상자의 [[총살]]을 지시하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문형순]] 서장과 같이 예비검속 학살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저항한 사례도 있었지만, 당시 해병대에 의해 주도된 예비검속으로 천 여명의 민간인들이 살해되었다.] [[6.25 전쟁]]에 해병대가 본격적으로 참전한 상황에서는 서해 도서작전과 동해 원산만 전면의 9개 도서 점령작전을 주도하여 동해안, 서해안에서 적의 보급물자와 병력이동을 완벽히 봉쇄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항일운동 경력과 한국전쟁 당시의 활약으로 김두찬은 [[전쟁기념관]]에 의해 [[2015년]] 12월 호국인물로 지정되었고, 2019년 11월 26일에는 [[해병대 교육훈련단|해병대교육훈련단]]에 [[http://kookbang.dema.mil.kr/newsWeb/m/20191128/8/BBSMSTR_000000010024/view.do|그의 이름을 딴 복합교육센터가 개관하였다.]] 그러나 상기의 4.3사건 당시의 행적으로 인해 김두찬관 개관은 [[http://naver.me/FboXFuM9|논란이 되었으며]] 이에 4.3관련 단체들이 강력히 항의하여 2020년 2월 3일 국방부의 시정조치로 현재 '김두찬관'의 간판이 내려갔고 새로운 이름을 공모해 2월 13일 충성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해병대는 개인의 이름보다는 해병대의 핵심가치인 충성, 명예, 도전 중 맨 처음 가치인 충성을 채택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분류:1919년 출생]][[분류:2011년 사망]][[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평양직할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김해 김씨]][[분류:건국훈장 애족장]] [[분류:대한민국 해병대사령관]][[분류:메이지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