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경주 김씨]][[분류:영천시 출신 인물]][[분류:1902년 출생]][[분류:1965년 사망]] || 성명 ||<(> 김낙헌(金洛憲)[* 호적명이라고 한다.] || || 일본식 성명 ||<(> 金德榮憲 || || 이명 ||<(> 김영헌(金榮憲) || || 자 / 호 ||<(> 치원(致元) / 일와(逸窩) || || 본관 ||<(> [[경주 김씨]] || || 생몰 ||<(> [[1902년]] [[8월 26일]] ~ [[1965년]] [[7월 7일]] || || [[출생지]] ||<(> 경상북도 영천군 환귀면 황강동[br](현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 인근의 양평리와 함께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추서 ||<(> 대통령표창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김낙헌은 1902년 8월 26일 경상북도 영천군 환귀면 황강동(현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에서 아버지 김규정(金奎鼎)과 어머니 [[경주 손씨|월성 손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http://yeong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yeongcheon&dataType=99&contents_id=GC05101406|#]] 이후 인근의 양평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1919년 4월 26일 영천군 임고면 양평동의 서당에서 22일 영천면 창구동 시장에서 미리 사둔 붉은 목면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한켠에 '대한독립만세'의 문구를 쓰고 또 다른 한켠에는 '영천군 임고면 양평동 김영헌'이라고 기재하였다. 그는 다음날인 27일 이 태극기를 들고 영천면 창구동 시장에 갔고, 대나무 장대를 구입하여 영천면 공립심상소학교(현 영천초등학교) 내 수로에 가서 태극기를 장대에 묶어 두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오후 6시 30분경 일본 순사 보리 손토쿠(補李存得)가 이를 수상히 여겨 그를 신문하자 문득 깃발을 꺼내어 '대한독립만세'라고 수 차례 외치고 곧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5월 1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8개월형을 언도받고[[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1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1745&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 공소하였으나 6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680&evntId=0034984243&evntdowngbn=Y&indpnId=0000015769&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1926년 6월에는 [[순종황제]]가 붕어(崩御)하자 조선시대 전통 상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규탄하는 글을 보냈다가 일본 경찰에 재차 체포되어 수개월간 구금되었고, 1938년에는 '대한복수가(大韓復讐歌)'를 작사하여 지역민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65년 7월 7일 별세하였다. 사후 1992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