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문묘 배향 18현)] |||| [[파일:김굉필.jpg]] || ||<tablealign=center> '''성명''' ||<(> 김굉필(金宏弼) || || '''본관''' ||<(> [[서흥 김씨]] || || '''출생''' ||<(> [[1454년]] [[조선]] [[한성부]] 정동 || || '''사망''' ||<(> [[1504년]] [[10월 7일]] (향년 51세) [[조선]] [[전라남도|전라도]] [[순천시|순천군]] || || '''국적''' ||<(> [[조선]] || || '''자''' ||<(> 대유(大猷) || || '''호''' ||<(>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한훤(寒暄)·말곡(末谷) || || '''시호''' ||<(> 문경(文敬) || [목차] == 개요 == > 나는 소학동자, 나랏일을 어찌 알겠는가 > ---- > 남효온의 사우명행록 [[조선]] 전기의 [[유학자]]이자 [[관리]]. 본관은 서흥. [[김종직]]의 [[제자]]이며 [[조광조]]의 [[스승]]이고 [[남효온]]의 [[친구]]이다.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과 함께 동방사현이라 불린다.[[http://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32|참조]][* 동방 18현에서 조선 시대 초기 4명을 이어놓으면 이렇게 되는데 조선 [[성리학]]의 초기 계보이다.] == 생애 == 30세가 될 때까지 [[소학]]을 읽으면서 수기를 하였다. 김종직은 김굉필을 극찬했는데 ‘성인(聖人)이 될 바탕이 있다’고 [[칭찬]]했다. 40세가 넘어서야 [[벼슬]]에 나갔다. 김종직의 제자였지만 김종직이 현실 타협적인 면을 보인다고 [[비판]]하여 사이가 나빠졌으며 김종직이 죽었을 때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http://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65|참조]] 1498년([[연산군]] 4년) 7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朋黨)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고 임금의 정치를 비난하거나 시국을 비방했다”는 죄로 벌을 받게 된다. [[곤장]] 80대, [[평안북도]] [[희천시|희천]](熙川) [[유배]]형을 받았다.[* 이때 아버지 부임지에 거주하던 조광조가 희천에 김굉필이 유배왔다는 것을 전해듣고 배움을 청하여 제자가 되며 소학동자라 불리던 김굉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2년 후 다시 [[전라남도]] [[순천시|순천]](順天)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1504년(연산군 10년) 9월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다시 한 번 연루되어 [[사약]]을 받게 되는데 향년 51세였다. 그 후 김굉필의 부인은 "책을 봐서 사형에 처해졌다"고 책을 전부 불태우고 자식들과 함께 [[경상남도]] [[창녕군|창녕]]으로 내려간다. 1610년([[광해군]] 2년) 조광조, 정여창, 이언적, [[이황]]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 여담 == [[소학]]을 좋아했으며 친구인 [[남효온]]의 '사우명행록'에서는 자신을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불렀다고 한다. 제자인 [[조광조]] 역시 소학을 매우 좋아했다.[[http://www.itkc.or.kr/itkc/post/PostServiceDetail.jsp?menuId=M0444&clonId=POST0018&nPage=7&postUuid=uui-4b7ea821-8445-4449-baac-0334|참조]] 대표적인 제자로는 조광조, [[김안국]], [[이장곤]], 김정국 등이 있다. == 참고 == [[http://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65|사옹(蓑翁) 김굉필 “겉은 젖을망정 속까지 젖지는 않겠다”]] == 관련항목 == * [[도동서원]] [[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서흥 김씨]][[분류:1454년 출생]][[분류:150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