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일제강점기의 개신교 신자]][[분류:안산 김씨]][[분류:용천군 출신 인물]][[분류:1882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 || 성명 ||김경념(金敬念) || || 자 / 호 ||의전(義田) / 신암(愼菴) || || [[본관]] ||[[김(성씨)|안산 김씨]][* 상호군 암(巖)-의주파.] || || 생몰 ||[[1872년]] [[10월 30일]]~[[1950년]] [[9월 29일]] || || [[출생지]] ||[[평안도]] [[용천군|용천도호부]] 양상면 용덕동[br](현 [[평안북도]] [[피현군]] 충렬리) || || 사망지 ||[[충청북도]] [[옥천군]]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김경념은 1872년 10월 30일 평안도 용천도호부 양상면 용덕동(현 평안북도 피현군 충렬리)에서 김정락(金定洛)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5살 때 한문과 서예를 익혔고, 20살 때 [[사서삼경]]을 익혔으며, 독학으로 역사학과 법학, 경제학을 배웠다. 1897년 신문화 수입을 주창하면서 부조금제의 폐지 등을 강조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한국인 자제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옥성, 홍명, 오봉, 선화, 남제소학교를 건설했으며, [[최광옥]]과 함께 각처에 초등학교 및 강습소를 설치하여 교육자를 양성하고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1908년경 [[안창호]], [[양기탁]], [[김구]], [[전덕기]] 등이 주도하는 [[신민회]]에 가입하여 비밀결사와 국권회복의 모의 및 국내외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장남인 김청달(金淸達)을 상하이에, 차남인 김명달(金明達)을 만주에 파견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몇 달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조병준]], 백일진(白日鎭) 등과 함께 향리에서 만세 시위를 주동하였으며, [[중국]] [[봉천성]] [[단둥시|안동현]] 이륭양행 밀실에서 양준명(梁俊明) 등과 함께 〈독립신문〉 지방판을 간행하여 만주와 국내에 배달해 항일정신을 각성시키려 했다. 그러나 1919년 4월 국내 애국지사들이 상하이와 만주로 망명할 때 그들이 압록강을 건널 수 있도록 안내한 것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장남 김청달, 삼남 김삼달(金三達)과 함께 체포되어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 후 독립자금을 마련하여 10여 차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했으며, 1920년에는 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의 용천군 참사(參事)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 및 독립군에 대한 교통 편의를 제공하다가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서 몇 달간 복역했다. 출소 후 기독교에 입교했으며, 1923년에는 선교사 매큔의 요청에 따라 선천의 신성중학교, 보성여학교의 교원이 되어 학생들의 애국정심을 함양시켰다. [[8.15 광복]] 후, 그는 반탁 운동에 참가했고 개성에 있는 3남 김삼달의 자택에서 〈대한독립사〉를 편찬했다. 그러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장남 자택에 피신했다가 1950년 9월 2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김경념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실향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