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이영민 타격상/1958년~2000년)] ||<-2><table align=right><table width=430><bgcolor=#ffffff,#191919> || || '''이름''' || '''김건덕 (金建悳)''' || || '''생년월일''' || [[1976년]] [[6월 17일]] || || '''출신지''' || 정부 직할 [[부산광역시|부산시]] || || '''사망''' || [[2016년]] [[11월 17일]](향년 40세) || || '''국적'''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width=28]] [[대한민국]] || || '''학력''' || 대신중-[[부경고등학교 야구부|경남상고]]-[[한양대]] || || '''포지션''' || [[투수]], [[지명타자]] || || '''투타''' || [[우투우타]] || || '''프로입단''' || - || || '''국가대표''' || 대한민국 U-20 (1994년) || || '''경력''' || [[춘천고등학교 야구부]] 코치[br][[부경고등학교 야구부]] 코치[br]부산 시상리틀야구단 감독 ||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및 야구코치. == 생애 == === 초고교급 에이스가 되다 === 1994년은 그에게 있어서 엄청난 한해였다. 이.해 [[이영민 타격상]]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고, 경남상고는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4강과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에 올라갔지만, 아쉽게도 두 번 모두 [[덕수고등학교 야구부|덕수상고]]에게 패하면서 정상을 밟지 못했다. 이 해 열린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의 우승을 이끌고 대회 MVP가 되기도 했다. === 불행의 시작 === 이러한 활약 덕에 롯데, 대학 등 여러 곳에서 러브콜이 들어왔다. 졸업반 당시 김건덕은 내심 [[롯데 자이언츠]] 입단이나 [[연세대]]행을 바랐지만, 결국 한양대에 진학했다. 당시 롯데는 2억 5천만원이라는 파격적인 금액을 제안했으나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로 결국 대학 입학을 하게 된다.[* 이후 김건덕의 아버지는 아들의 인생을 망쳤다며 이를 자책하면서 술만 마시다가 돌아가셨다.] 한편, [[2012년]] 이승엽이 [[힐링캠프(SBS)|힐링캠프]]에 출연해 한 말에 따르면 이 당시 교육부의 규정에 따르면 체육특기자라 하더라도 수능시험 총점이 40점을[* 당시는 200점 만점이었다. 400점 만점으로 수능이 변경됐을 땐 80점이 커트라인이었다.] 넘지 못하면 대학 입학이 불가능했다. 이승엽과 김건덕 둘 다 한양대 입학을 위해서 합숙소에 잡혀 있었는데, 여기서 일부러 수능을 못보기로 의기투합해서 김건덕은 37점, 이승엽은 37.5점이 나왔다. 고의로 수능을 망친 후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아버지께 "죄송합니다. 지 시험 떨어졌으예"라고 말했는데, 아버지가 "무신 소리고? 건덕아, 니는 실업계라 내신 성적이 반영돼 커트라인은 크게 의미가 없다. 뭐 하노. 후딱 서울로 안 올라가고"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온 이승엽과는 달리 [[전문계 고등학교]]인 경남상고를 나온 김건덕은 수능 점수랑 상관이 없어서 결국 대학을 가야했다. [[박동희(기자)|박동희]]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한양대는 “장학금과 경남상고 동기 2명을 받아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고교 진학 때처럼[* 중학교 시절부터 부경고 감독이 수시로 찾아와 챙겨줬고 동문회 회장이 회비 면제에 장학금까지 보장했다고 한다.] 장학금에 자신의 진로를 결정해야 했던 김건덕은 생전 “장학금은 둘째치고 친구들이 마음에 걸려서 도저히 ‘김건덕만 받겠다’는 연세대로 갈 수 없었다.”라며 한양대행을 택했다. === 대학 진학 이후 === 고교시절의 혹사로 인해 김건덕의 어깨는 망가진 상태였고, 한양대 입학 후 1년 동안은 투수로 등판하지 않기로 했었지만 국제대회에 참가하면서 다시 공을 던지게 되었다. 결국 부상이 악화되어 2학년부터 어깨 통증을 호소했고, 더 이상 투수로 뛰지 못하고 타자로 전향하게 된다.[* 당시 포지션은 지명타자.] 한편, 롯데는 99년 신인드래프트 당시 김건덕의 투수로서의 가치가 사라지자 1차지명 때 그를 포기했고[* 대신 지명한 선수는 [[개성고등학교 야구부|부산상고(개성고)]] - [[경성대학교 야구부|경성대]] 투수 정원욱이었다. 현재 모교인 개성고등학교 감독을 맡고 있다.] 결국 김건덕은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 안타까운 것은 입학 당시 재활하면 나을 정도의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그러던 중 그의 재능을 아까워 한 [[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 팀이 김건덕을 불러 [[경산 볼파크]]에서 5개월 정도 재활을 해보자며 제의를 했고, 김건덕도 감사한 마음으로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훈련을 하던 중 갑작스럽게 군대 영장이 날아왔고, 김건덕은 군면제를 위해 체중을 131kg까지 늘리지만, 법이 바뀌면서 체중 과다로 면제되던 시절은 지나갔던지라 [[공익근무요원]] 판정을 받게 되었다. 결국 어려웠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2000년에 방위산업체로 가게 되는데, 그것이 또 한 번의 비극을 낳게 된다. 그곳에서 손가락의 살점이 잘리는 부상을 입게 된다. 그나마 절단이나 신경 손상은 아니었지만 결국 이 부상때문에 선수 생활은 완전히 접게 된다. 여기에 부상으로 인해 산업체에서 일을 못하게 되면서 구청에서 추가로 공익근무를 해야 했다.[* 방위산업체는 1년 이내에 편입이 해제되면 이전 근무기간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 이 시기에 4주 기본 군사훈련을 받으러 갔는데 거기서 부산지역 출신 후배였던 [[채태인]]을 만난다. 채태인은 훈련만 끝나면 찾아와 김건덕의 양말을 세탁해주고, 조교들로부터 얻은 초코파이도 선배님 드시라면서 갖다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나마 공익근무 10개월쯤 지났을 무렵에 제2국민역으로 편입되었다.[* 물론 자동으로 그리된건 아니고 20여가지 서류를 열심히 준비했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면제를 받으려고 했던 이유는 집안 생계 문제 때문이었다.] 사유는 생계곤란이었는데 생계곤란이면 이전에도 충분히 가능했었다.[* 2008년에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박동희가 이를 언급하자 그걸 몰랐다며 씁쓸해했다.] 씁쓸하게도 면제 직후 유통회사에 취직했지만 회사는 부도나고 아버지도 이 시기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비록 선수 생활은 그만두게 되었으나 야구배트를 파는 영업사원으로 있으며 야구와의 인연을 놓지 않았고, 춘천고, 부경고 코치를 거쳐 리틀야구단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지도자로 새로운 야구인생을 개척해 나갈 것으로 보였으나... == 사망 ==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529&aid=0000005301|하늘 그라운드로 떠난 ‘비운의 천재’ 김건덕]] [[2016년]] [[11월 17일]] 오전 11시경 갑자기 가슴 통증을 호소했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상황이 심각하지는 않았다. 혼자서 구급차까지 걸어갔고 병원이 멀지 않았기에 별 일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갑작스럽게 [[심장마비]] 증세가 악화되면서 김건덕은 병원 도착 전, 숨을 거두고 말았다. 향년 40세. == 여담 == * 보직은 투수였으나 타격 자질도 꽤 뛰어났던 선수로 1994년에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다만 본인은 불운 등이 겹치며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를 피해가지 못했다. * 위에 나온 [[이승엽]]과의 일화는 꽤 유명해서 훗날 국내 최초의 야구 뮤지컬인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로 각색되기도 했다. * [[부산광역시]] 출신임에도 [[삼성 라이온즈]]와 꽤 인연이 깊은데, 본인이 연습생 신분으로 삼성에서 훈련하기도 했고, [[이승엽]]과 훈련소에서 만난 [[채태인]] 모두 삼성에 입단했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ㄱ]][[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투수]][[분류:지명타자]][[분류:1976년 출생]][[분류:201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