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기삼연(奇參衍) || || '''생몰년도''' ||[[1851년]] [[1월 18일]] ~ [[1908년]] [[1월 2일]] || || '''출생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탁곡[* [[행주 기씨]] 집성촌이다. 의병장 [[기우만]], [[기산도]]도 이 마을 출신이다.][[http://www.jangseong.go.kr/home/www/healing/introduce/healing_09/healing_09_09/healing_09_09_02/show/196|#]] || || '''본관''' ||[[행주 기씨]] || || '''경력사항''' ||호남창의회맹소 || [목차] == 개요 ==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省齋)이다.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장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 생애 == 1851년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소곡리(小谷里) 탁곡(卓谷)에서 태어났다.[* 현 아곡리. 이 일대는 본디 행주 기씨의 세거지로 유명하다. 가까운 진원면에는 기정진이 세운 고산서원이 있다.] 기삼연의 집안은 대대로 전통적인 유교 가문으로 아버지는 생원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37_031049&curSetPos=4&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B|기봉진]](奇鳳鎭)이고, 어머니는 장흥 고씨(長興 高氏)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와 같은 항렬의 집안 어른이자 성리학자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기삼연에게 7촌 [[당숙]]이 된다.]에게 글을 배웠으며, 이런 영향 하에서 교육을 받은 행주 기씨 가문에선 기삼연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이 나왔다.[* 당숙 기정진을 비롯하여 기재(奇宰), [[기우만]](奇宇萬), [[기산도]](奇山度)등이 있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1896년에서 [[기우만]](奇宇萬)[* 1846~1916, 호는 송사(松沙). 기정진의 손자로 기삼연에게 9촌 [[조카]]가 된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과 함께 [[의병]]을 모집했다. 기삼연은 군사 부문을 담당하여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 불렸다. 그러나 의병을 일으키려고 할 즈음에 학부대신을 지낸 신기선(申箕善) 등이 내려와 왕명을 전하여 설득했고, 이에 [[의병]] 거병이 무산되었다. 기삼연은 [[대한제국]]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본뜻이 아닐 것이라며 다시 의병 운동을 도모했으나, 일진회 회원의 밀고로 이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전주 진위대에 의해 딸이 혼례를 치르는 날에 체포되어 [[한성부]] [[평리원]]으로 압송되었다가, 당시 평리원 원장인 [[이용태(1854)|이용태]]의 배려로 탈옥한 뒤 숨어지냈다.[* 현대에 친일파로 알려진 이용태가 의병장을 보호해준 것이 아이러니하겠지만 사실 이 시기 이용태는 누구보다 철저히 일본에 저항하는 근왕파 대신이었다. 결국 모든 저항 수단이 사라진 1909년에 일본이 주는 작위를 받게 되지만.] 1907년에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전국적으로 다시 의병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때 기삼연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관동리 수련산(秀蓮山)에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는 이름으로 의병부대를 구성하고 대장에 올랐다. 이들은 격문을 작성해 돌리면서 일본인과 일진회원을 처단하면 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전라남도]] [[장성군]], [[고창군]], [[영광군/행정#s-1.1.4|법성포]]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법성포의 순사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여러 차례 전공을 올렸다. 그러나 1907년 말부터 겨울철 추위로 세력이 위축되었고, [[담양군]]으로 피신했다가 기습 공격을 받아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기삼연은 담양에서는 몸을 피했으나 곧 [[순창군]]에서 체포되어 1908년 2월 3일 [[광주광역시|광주]] 서천교(西川橋)[* 현재 황금동 일대] 밑 백사장에서 총살형으로 사망했다. == 가족관계 == * 조부 : 재선(在善) * 부 : 봉진(鳳鎭) * 모 : 장흥 고씨(長興 高氏), 영진(永鎭)의 딸 * 첫째 부인 : 금성 오씨(錦城 吳氏), 긍수(兢洙)의 딸 * 녀: 익선(翼善) * 둘째부인 : 밀양박씨(密陽 朴氏), 감역(監役) 동연(東淵)의 딸, 정혜공(貞惠公) 수량(守良)후손 * 자 : 우현(宇玄) (1895~1961) * 녀 : 울산(蔚山) 김면수(金冕洙) 처(妻) * 셋째부인 : ○씨[* 족보에도 전해지지 않는다.] * 자 : 우생(宇生) (1884~1944) * 녀 : 옥천(玉川) 조면식(趙冕植) 처(妻) * 녀 : 울산(蔚山) 김홍중(金弘中) 처(妻) == 상훈과 추모 == * 1947년에 [[전북]] [[진안군]] 이산사(駬山祠)에 배향(配享)됨. * 1962년에 건국훈장(建國勳章) 국민장이 수여됨. * 1966년에 장성군 장성읍에 순국비(殉國碑)가 세워짐. == 작품 == 체포된 뒤 사형당하기 전에 지은 다음과 같은 한시가 남아 있다. >출사하여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出師未捷身先死)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 (呑日曾年夢亦虛)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1851년 출생]][[분류:행주 기씨]][[분류:장성군 출신 인물]][[분류:1908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 [[분류:건국훈장 독립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