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후삼국시대 호족들)] ||<tablealign=center><table bordercolor=#191970><#191970> '''{{{#white 자칭}}}''' ||||<:><white> '''평양성주장군(平壤城主將軍)''' || ||<:><#191970> '''{{{#white 이름}}}''' ||||<:><white> 금용(黔用) || ||<:><#191970> '''{{{#white 생몰연도}}}''' ||||<:><white> ? ~ ? || [목차] == 개요 == [[신라]] 말기와 [[후삼국시대]]의 [[군웅]]이자, [[호족]]. 한자음를 다르게 읽어서 [[유금필]]을 유검필로도 읽는 것처럼 검용이라고도 한다. == 상세 == 신라 말기 [[진성여왕]] 시대에 전국에서 [[호족]]과 [[도적]]떼가 들고 일어나 난세가 시작될 때 금용은 [[평양]]성주장군(平壤城主將軍)으로 있었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가 [[평양]]을 자기네 땅으로 삼았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다소 논란이 있어서, 금용을 [[발해]]의 변방 지배자로 보거나 혹은 신라나 발해 어디의 간섭도 받지 않던 토착 세력 정도로 보는 관점도 더러 있다. 사실 신라도 [[나당전쟁]] 끝나고 얻은 영토에서 계속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고 주민들 이주시키고 개척하면서 조금씩 북쪽으로 올라갔었기 때문에,[* [[676년]] [[나당전쟁]] 승리([[임진강]]선) → [[694년]]([[효소왕]]3) [[송악]]성 축성([[예성강]]선) → [[748년]]([[경덕왕]]7) 대곡성(오늘날 [[평산군]]) 등 축성 → [[선덕왕]]대 패강진([[황해도]] 일대) 개척 → [[헌덕왕]]대 취성군(오늘날 [[황주군]] 및 [[중화군]]) 설치] 삼국사기 지리지상 최서북단인 황주나 중화에서 평양이 멀지 않으니[* 특히 중화군은 북한 치하에서 평양에 편입되었던 적도 있을 정도로 바로 앞 지역이다.] 아마도 9세기 후반쯤 가면 평양도 통치권에 들어갈랑 말랑 했을 수도 있다고 대충 추론은 해볼 수 있다. 대체로 [[남북국시대]] 지도에는 발해가 평양을 먹은 것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지만 발해 중심지는 평양에서는 매우 먼 [[상경용천부]]였고, 발해가 평양을 접수해 다스렸다는 근거도 딱히 없는 데다 9세기 후반 이때쯤 가면 발해도 끝물인 건 신라와 비슷했기에 뭐라고 확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어땠든 [[궁예]]가 한참 사방으로 땅을 넓힐 때 평양과 인접한 [[패서]]의 [[왕륭]], [[박지윤(고려)|박지윤]], [[황보제공]], [[유천궁]] 등 군소 호족들에게 항복을 싹 받아내고 905년에는 패서 13진(鎭)을 만드는 등 [[태봉]]국의 기반을 다지자 바로 인접하게 된 금용도 궁예에게 항복해왔다. 같은 시기 인근 증성(甑城, 지금의 [[남포특별시]] [[강서군]])의 적의적(赤衣賊), 황의적(黃衣賊), [[명귀]](明貴) 등이 항복하고 염주 지역에서 대항하던 [[유긍순]]을 무너뜨리고 그 땅을 먹으면서 궁예 세력이 [[대동강]] 이북 일부까지 뻗치게 된다. [각주] [[분류:후삼국시대/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