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부여 국왕)] ||<-3><bgcolor=forestgreen><tablealign=right><tablebgcolor=#fff,#2d2f34><tablebordercolor=#ffffff> '''{{{#gold 부여 제3대 군주}}}''' || ||<-3><bgcolor=forestgreen> '''{{{#gold 동부여 제2대 군주}}}'''[br]'''{{{#gold {{{+1 金蛙王 | 금와왕}}}}}}''' || ||<bgcolor=forestgreen> '''{{{#gold 왕호}}}''' ||<-2>'''금와왕(金蛙王)''' || ||<bgcolor=forestgreen> '''{{{#gold 성씨}}}''' ||<-2>해(解)(?) || ||<bgcolor=forestgreen> '''{{{#gold 휘}}}''' ||<-2>금와(金蛙) || ||<bgcolor=forestgreen> '''{{{#gold 왕태자}}}''' ||<-2>[[대소왕|해대소]](解帶素) || ||<bgcolor=forestgreen> '''{{{#gold 왕자}}}''' ||<-2>갈사국왕 외 5명 || ||<bgcolor=forestgreen> '''{{{#gold 부왕}}}''' ||<-2>[[해부루|부루왕]](扶婁王) || ||<bgcolor=forestgreen> '''{{{#gold 생몰년도}}}''' || 음력 ||기원전 90년경 ~ 기원전 19년경 || ||<bgcolor=forestgreen> '''{{{#gold 재위기간}}}''' || 음력 ||기원전 59년 ~ 기원전 19년경 || [목차] [clearfix] == 개요 == [[부여]]의 [[왕]]. [[해부루]]의 아들이며 [[대소왕]]의 아버지. 부여의 건국 설화와 [[고구려]]의 건국 설화에 모두 등장하는 인물로 대소왕의 아버지이며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과 그 어머니 [[유화부인]]을 거두어준 인물로도 유명하다. [[남당유고]]의 추모경에 의하면 아들이 5명이다. 그중에서는 [[온조]]와 [[비류]]의 아버지라고 추측되는 [[우태]]도 있다. 그러나 남당 박창화가 남긴 책들이 그렇듯이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기는한지 심히 의심되는 기록이기에 믿을 수 없으며 정작 [[삼국사기]]에는 아들이 7명이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 일생 == === 출생 설화 === [[삼국유사]]에서는 금와왕의 탄생 설화를 다루고 있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3563&cid=49616&categoryId=49616&expCategoryId=49616|##]] 금와왕의 아버지 해부루왕은 나이가 들어도 후사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해 고심하던 중에 산천에 제사를 지내며 아들을 점지해줄 것을 빌었다. 그랬더니 해부루왕이 탄 말이 곤연(鯤淵)이라는 곳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보고 [[눈물]]을 흘렸다. 해부루왕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돌을 치웠더니 금빛 [[개구리]] 형상의 아이가 나타났다.[* 삼국사기에서는 개구리가 아닌 [[달팽이]](蝸) 형상이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 蛙와 蝸의 발음이 서로 같다.] 이에 해부루왕은 하늘이 자신에게 아들을 주었다고 기뻐하며 아이를 거두어 금와(金蛙)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들로 삼았다. 후에 금와는 장성하여 [[태자]]가 되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되었다. 금와왕의 아들 대소가 기원전 58년에 태어난 주몽보다 연상으로 보이기에 금와왕 본인은 대략 기원전 9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 유화 부인과 만나다 === ||[[파일:46_금와왕과_유화부인.png]]|| ||1854년 우타가와 사다히데(歌川 貞秀)의 그림책 조선정벌기(絵本 朝鮮征伐記). 금와왕이 유화부인을 만나는 모습을 묘사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재위에 오른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의 우발수를 지나다가 유화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유화부인은 스스로를 강의 신인 [[하백]]의 딸이라 소개하였으며 자신이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와 야합하였다가 중매도 없이 외간 남자와 놀아났다며 벌을 받아 우발수로 쫓겨났다고 말하였다. 금와왕은 유화부인을 거두어 방에 두었는데 햇빛이 계속해서 유화부인을 비추더니 유화부인이 임신을 하여 큰 [[알]]을 낳았다. 금와왕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알을 짐승들에게 던져주었으나 짐승들이 이를 먹지 않고 오히려 감싸돌며 지켰다. 결국 알을 깨뜨리려고 하였으나 알이 깨지지 않아 다시 유화부인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이 알에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었다. 금와왕의 [[장남]]인 태자(太子) 대소는 주몽의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주몽은 유화부인의 도움을 받아 엄사수를 건너서 [[졸본]] 땅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니 기원전 37년 2월의 일이었다. 이후 기원전 24년 부여에 남아있던 유화부인이 죽었는데 이에 금와왕은 [[태후]]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고 신묘(神廟)를 세웠다.[* 이 때문에 유화부인이 부여로 넘어가면서 금와왕의 여인이 되었을 것이라고도 하고 유화부인이 금와왕의 조부인 해모수의 아이를 낳았으므로 금와왕이 의붓할머니로 대접한 것이라고도 한다. [[왕후]]가 아닌 태후의 예로 모신 것을 보면 후자의 의견이 더 맞는거 같다.] === 죽음과 사후 === 금와왕이 언제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부여에서 살던 [[예씨 부인]]과 아들 [[유리]]가 기원전 19년에 고구려로 넘어간 것을 보아 이 즈음에 왕이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금와왕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훗날 금와왕이 죽자 장남이었던 대소가 그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되었다. 대소왕은 훗날 고구려와 대립하던 중에 [[대무신왕]]과의 싸움에 패하여 서기 22년에 죽었는데 그 막내동생이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추종 세력을 이끌고 부여를 빠져나와 동남쪽에 [[갈사국]]을 세웠다. 갈사국은 46년 뒤인 서기 68년에 손자 [[도두]]가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사라진다. 한편 대소왕의 사촌동생은 서기 22년에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낙씨 성을 받고 대무신왕으로부터 부여의 왕으로 책봉받았는데 이후에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부여([[위구태왕]], [[부태왕]] 등이 다스린 나라)가 이 사람의 후손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전자의 거점은 [[연나부]], 후자의 거점은 [[소노부]]로 미묘하게 다르기에 확실하지 않다. ==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 [[파일:금와왕1.jpg]] [[파일:금와왕2.png]] [[사극]] [[주몽(드라마)|주몽]]에서는 [[전광렬]]이 열연하였다. 본작에서는 설화적인 기록에 상상력을 입혀 금와왕이 유화부인을 깊이 사모했던 것으로 묘사한다. 유화부인이 남편인 해모수와 아버지 하백을 [[한나라]]군의 공격으로 잃고 방황하자 이를 거두어주고 유화부인이 해모수 사이에서 낳은 주몽 역시 거두어 아들로 키운다는 설정이 바로 그것이다. 전체적으로 박력있고 카리스마 있는 영웅적인 이미지로 묘사되며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한 깊은 고뇌를 앓는 강렬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어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왕자 시절에 해모수와 함께 [[고조선]]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거나 아들 대소와 [[사출도]]의 반란에 휘말려 잠시 왕위를 잃기도 하는 등 허구적 설정도 많아 지탄을 받았다. 특히 역사적으로는 할아버지인 해모수와 혈연 관계가 삭제되어[* 이것은 해모수와 부자지간인 해부루도 마찬가지다.] 친구 사이가 되었다. [[분류:부여의 왕]][[분류:생년 미상]][[분류:기원전 2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