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금관총 금귀걸이1.jpg]]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금귀걸이-미상/AAEj80DuDsPikg?hl=ko|사진 출처 : Google Arts & Culture 금관총 금귀걸이]] [[파일:금관총 금귀걸이3.jpg]]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금귀걸이/ygFlmnXGTtwlXQ?hl=ko|사진 출처 : Google Arts & Culture 금관총 금귀걸이]] [[파일:금관총 금귀걸이6.png]]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51006.010220800100001|사진 출처 : 영남일보 금관총 전시실]] [목차] == 개요 == 1921년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의 [[금관총]]에서 출토된 고[[신라]]시대 [[금(원소)|순황금]] [[귀걸이]] 500여점. 현재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 == 내용 == || [[파일:금관총 금귀걸이4.jpg|width=450]] || [[파일:금관총 금귀걸이5.jpg|width=300]] || |||| [[https://news.joins.com/article/18356130|사진 출처 : 중앙일보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 귀걸이]] || [[일제강점기]]인 1921년 [[금관총]]에서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등의 여러 황금 유물들과 함께 발견된 다양한 [[한국]]의 금귀걸이들로, 유물의 제작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대략 5세기경(서기 400년대)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금관총에서는 순금제[[귀걸이]], 금제와 은제 [[팔찌]], [[반지]] 등과 각종 [[구슬]], 금제와 은제의 [[허리띠]], 금동제[[신발]] 등의 각종 장신구를 비롯하여, [[도검]], [[갑옷]](甲胄), 창신(槍身), 쇠화살촉(鐵鏃), 쇠도끼(鐵斧) 등의 무기류와 말안장금구, 말방울, 말띠장식, 교구, 혁대금구 등의 말갖춤류(馬具類), [[신라토기]], 목칠기, 유리용기, 쇠솥(鐵釜), 금속제용기, 조개제품 등 많은 유물들이 부장되어 있었는데, [[곡옥]](曲玉)을 포함한 각종 구슬류만도 무려 3만 점이 넘었으며, 다른 유물까지 합쳐 약 4만점이 넘는 신라시대 화려한 문화재들이 쏟아져 나왔다.[[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32422&cid=42665&categoryId=42666|한국 미의 재발견 - 고분미술 : 금관총]] 금관총에서 발견된 금귀걸이의 경우 수량이 많아서 일일이 세어보기 힘들었고, 무게로 재본 결과 [[황금]]의 총량만도 7.5㎏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었다.[[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794477&cid=46619&categoryId=46619|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금관총]] 이후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세부 분류한 결과 약 500여점이 확인되었다. [[파일:금관총 금귀걸이2.jpg]] [[황남대총 금귀걸이]],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호우총 금귀걸이]],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 [[은령총 금귀걸이]], [[경주 월성로 금귀걸이]], [[금귀걸이]] 등과 함께 고신라시대 귀걸이 문화를 연구해볼 수 있다. 오직 [[신라]] 고분에서만 발견되는 정교한 황금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로,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 전, 고신라시대의 금세공기술 및 금속공예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금관총 금제 허리띠]] 도난 사건 때 이 귀걸이들 중 일부도 약간의 피해를 입었다. [[분류:신라의 금제유물]] [[분류: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 [[분류: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