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한국의 정부수립 이전 정당)] 勤勞人民黨. 약칭으로 근민당이라고도 한다. [[여운형]]이 1946년 12월에 정계은퇴선언과 동시에 남로당을 탈당하고 난 이후 1947년 5월 24일, 제2 차 미소공위가 재개될 조짐을 보이자, 여운형은 남부지방을 순회하면서 연설을 하였고 정치동향을 조사하였는데, 조사 결과 과거 [[인민당]]의 절반 정도가 [[남로당]]에 들어갔지만 아직 10만여 명의 지지자가 있다고 보고 이를 기반으로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였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통해서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당시 여운형은 정계은퇴를 했다고 해도 좌우합작운동을 통한 통일임시정부 수립노선은 분명하게 고집하였다.] 당수는 여운형, 부당수는 장건상[* [[장택상]]이 아니다. 유의하자. 참고로 장건상은 장택상의 먼 친척 뻘로(같은 항렬, 정확하게는 12촌이다.), 서로 형님-아우 하며 지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분의 증언에 따르면, [[대구광역시|대구부]] [[달성공원]]에서 여운형의 연설이 있었을 때 달성공원이 꽉 찼고, 연설을 듣고 감흥을 받아 근민당에 가입한 청년들이 많았다고 한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32151.html|직접 겪은 사람의 증언]] 그러다가 당수 여운형이 7월 19일, '''창당 두 달도 안 되어 [[암살]]당하면서''' 몰락하였다. 여운형은 이와 동시에 좌우합작운동에서 가장 구심점과도 같은 역할을 한 인물이라 좌우합작운동은 여운형 암살 이후 진전이 없어지게 되었고, 결국 12월 말에 해체된다. 여운형 암살 이후에는 [[홍명희]]가 당수가 되었으나 홍명희의 인기는 여운형에 댈 것이 못 되었다. 홍명희는 소설가, 문학가로 정평이 나 있지 정치적 입지로는 어울리지 못했다. 그 뒤에 장건상이 당수가 됐다. 게다가 장건상이 남북협상에서 근민당 당수 자격으로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할 때 일부는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고 아예 북한에 잔류하면서 몰락하였다.[* 장건상도 말실수로 감금됐다가 겨우 풀려났다.] 그 뒤에 [[장건상]]은 [[여운형]]의 친동생 [[여운홍]]을 따라 [[자유당]]에 입당했다. 측근인 [[조동호]]는 여운형 암살 이후 아예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낙향했다. [[안습]]. 또한 김두한의 자서전에 따르면, 1947년에는 당사를 우익 청년단에게 빼앗긴 적도 있다고 한다. 김두한이 2천명의 대한민청 청년단원을 동원해 근로인민당 본부를 습격해, 간판과 서류를 불사르고 당사를 '전국학련'에 넘겨 주었다고 한다.[* 출처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 1』(메트로신문사, 2002), p191.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p248에서 재인용.] [[분류:대한민국의 진보정당]][[분류:사회민주주의 정당]][[분류:1947년 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