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백제 국왕)] ||<-3><:><#4eae47><table width=450><table bordercolor=#4eae47><table bgcolor=#fff,#1F2023><tablealign=right>'''[[백제/왕사|{{{#gold 백제 제14대 건길지}}}]]'''[br]'''{{{#gold {{{+2 近仇首王 | 근구수왕}}}}}}''' || ||<:><width=100><#4eae47> '''{{{#gold 시호}}}''' ||<-2><(> 근구수왕(近仇首王) || ||<:><#4eae47>'''{{{#gold 성씨}}}'''||||<(> 부여(扶餘) || ||<:><#4eae47>'''{{{#gold 휘}}}'''||||<(> 구수(仇首) · 수(須)[* 《[[양서]]》에서도 수라고 써있다.] / 귀류(貴流) · 구소(久素)[* 《[[속일본기]]》.] / 귀수(貴首) · 귀수(貴須)[* 《[[신찬성씨록]]》.] || ||<:><#4eae47>'''{{{#gold 왕후}}}'''||||<(> 아이부인(阿爾夫人) || ||<:><#4eae47>'''{{{#gold 왕자}}}'''||||<(> [[침류왕|부여침류]](扶餘枕流), [[진사왕|부여진사]](扶餘辰斯) || ||<:><#4eae47>'''{{{#gold 부왕}}}'''||||<(> [[근초고왕]](近肖古王) || ||<:><#4eae47>'''{{{#gold 모후}}}'''||||<(> 왕후 진씨(王后 眞氏) || ||<:><#4eae47>'''{{{#gold 생몰연도}}}'''||<:> 음력 ||320년대 이전[* 손자인 [[진손왕]](辰孫王)이 356년생이라고 한다. 그러면 나이 추측이 가능하다. 게다가 둘째 아들의 아들이니 나이 차이가 좀 났을 것이다. 저 320년대 이전이라는 것 역시 최소의 나이로 역산한 것이다.] ~ 384년 4월 (60~70대 추정) || ||<:><#4eae47>'''{{{#gold 재위기간}}}'''||<:> 음력 ||375년 11월 ~ 384년 4월 (9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늘 이후, 누가 어려움을 극복하여 다시 이곳[* 수곡성 인근 지역으로 현재의 [[황해남도]] [[신계군]].]에 오겠는가?''' >今日之後, 疇克再至於此乎? >---- >[[치양 전투]]의 승리 이후의 발언. 전성기 백제의 강력함을 보여준다. [[백제]]의 제14대 [[국왕]]이자 [[건길지]]. [[이름]]은 기록에 따라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양서]](梁書)》에는 수(須), 《[[신찬성씨록]]》에는 귀수(貴首) 또는 근귀수(近貴首), 《[[속일본기]](續日本紀)》에는 귀류(貴流) 또는 구소(久素). == 생애 == === 태자 시절 === ||<tablealign=right><table width=35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근초고왕과 고구려의 충돌 지역.png|width=100%]]}}}|| || [[치양 전투|치양]]과 [[평양성 전투(371년)|평양성]]의 위치 || 근초고왕의 아들로 태자 시절에 아버지 근초고왕과 함께 여러 [[전쟁]]에 참여해 많은 전공을 세워 [[명망]]을 높였다.[* 때문에 삼국사기 원문에서도 대부분의 국왕 본기가 즉위년부터 기록이 시작되는데 근구수왕 본기는 근초고왕 재위 기간에 있었던 태자 시절 기록부터 상세히 나오는 편이다.] 371년 [[치양 전투|반걸양(치양) 전투]]에서 본래 백제 사람이었던 [[사기]](斯紀)가 백제로 다시 돌아와[*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주했었는데 이 때 다시 귀환.] 부여수에게 고구려의 [[군사기밀]]을 제공했다. 고구려군은 숫자는 많으나 붉은색 [[깃발]]을 들고 있는 군대만 정예군이고 나머지는 [[오합지졸]]이니 붉은색 깃발을 들고 있는 군대만 격파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무너진다는 것이 내용의 요지. 그 결과 근구수는 고구려군을 박살내고 고구려군의 1/4인 5,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뒤쫓아 수곡성[* 지금의 [[황해도]] 신계 부근으로 추정.]까지 진출했다. 부여수는 더욱 진격하려고 했지만 장군 [[막고해]]가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노자]]의 [[도덕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만류하였다. 부여수는 이를 옳다고 여기고는 더 이상 고구려군을 추격하지 않았고 대신에 [[돌]]을 쌓아 올려 표시를 남겨 놓고는 그 위에 올라 "오늘 이후로 누가 다시 이 곳에 올 수 있는가?"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근구수왕의 [[말발굽]] 자국은 삼국사기의 지금인 [[고려시대]] 때까지도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백제에서 근구수왕 이후로 [[평양성]] 근처까지 밀고 간 왕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2년 뒤인 371년 다시 보복전을 걸어오지만 이 때는 아버지 근초고왕과 함께 나서서 그들을 물리친다. === 왕위에 오른 후 === 375년 정작 [[왕위]]에 즉위하고 난 뒤에는 고구려와의 전쟁이나 [[외교]] 업적 이외에는 기록이 별로 없는 탓에 [[내정]]에 대한 부분은 자세히 알 수 없다. >'''二年 以王舅眞高道爲內臣佐平 委以政事''' > 2년(서기 376) 임금의 외삼촌 진고도(眞高道)를 내신좌평으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즉위 1년째인 376년 [[장인어른]]인 진고도(眞高道)를 내신 좌평으로 삼았다. 여담으로 [[근초고왕]]의 [[처가]]가 진씨인데 근구수왕의 [[아내]] 역시 진씨다. [[4세기]] [[백제]]에서 [[외척]] 진씨 [[가문]]의 강대한 위세를 알 수 있는 부분. >'''冬十一月 高句麗來侵北鄙''' >겨울 11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376년 11월 고구려가 침공하여 다음 해까지 치열히 싸웠다. > '''三年 冬十月 王將兵三萬 侵高句麗平壤城''' > 3년(서기 377) 겨울 10월, 임금이 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침범하였다. > '''十一月 高句麗來侵''' > 11월, 고구려가 침범해왔다. > ---- > '''《[[삼국사기]]》백제본기 근구수왕''' 이에 377년 10월 근구수왕은 병사 3만명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377년 11월에 고구려가 또다시 남침을 개시해 왔다. 379년 3월 [[중국]]의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냈는데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사신단이 동진에 도착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한편 중국 기록 《양서(梁書)》 백제전에서는 '동진 태원(太元)년간(376년~396년)에 백제왕 수(須)가 …중략… 생구(生口, [[노예]])를 헌상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나중에 언젠가 다시 사신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중국은 물론 한편으로는 [[일본]]과도 [[국교]]를 맺어 중국의 제반 [[문물]]을 일본에 전하기도 했다. 특히 일본에서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 [[학자]]를 구하므로 본인의 손자 [[진손왕]](辰孫王)과 함께 [[왕인]](王仁)을 일본에 보내면서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가게 하였으며 왕인은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382년에는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 한편 《[[일본서기]]》에 따르면 382년에[* 일본서기 상으로는 262년. 이는 120년 갑자설 때문에 시기가 앞으로 당겨진 것이다.]에 왜인 [[카츠라기노 소츠히코]]가 가라국(비정 미상)을 공격해 가라국 왕이 백제로 귀부하자 [[망명]]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료 [[해석]]의 문제 때문에 확실치는 않다. 재위 9년만인 384년 4월에 [[승하]]했는데 공교롭게도 동년 11월에 [[라이벌]]인 [[고구려]]의 [[소수림왕]] 역시 승하했다. == 평가 == 부왕인 [[근초고왕]] 재위기 때부터 전장을 누비며 활약했고 즉위 이후 [[전성기]]를 유지시키는데 성공하며 백제의 양대 전성기를 구축해냈다. [[태자]] 시절부터 백제의 최전성기의 주역으로 맹활약하였으며 즉위 이후에도 아버지 근초고왕이 이룩한 백제의 전성기를 유지시킨 왕으로 평가받는다. 아버지 [[근초고왕]]과 함께 백제의 [[군주]]들 중 [[평양성]]을 직접 마주한 유이한 왕이기도 하다.[* [[성왕(백제)|성왕]]의 경우에는 [[논란]]이 있다.] 하지만 [[라이벌]]인 [[소수림왕]]이 [[고구려]]를 부강하게 만드는 [[개혁]]에 성공해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 고구려가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한 것과 달리 근구수왕은 이미 근초고왕 말년부터 시작된 백제의 쇠퇴를 자신의 치세에 최대한 늦추는 것에 그쳤다. 근구수왕 사후 [[장남]]인 [[침류왕]]은 [[불교]] 공인 외에는 [[업적]]이 없이 죽고 침류왕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아신왕]]이 [[나이]]가 어려 자신의 [[차남]]이자 침류왕의 동생인 [[진사왕]]이 즉위한 후 백제는 이 때부터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콤보]]를 얻어 맞으며 [[수도(행정구역)|수도]]인 [[서울특별시|한성]]까지 함락당하는 상황이 된다. == 삼국사기 기록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83&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삼국사기》 근구수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근구수왕이 즉위하다 二年 장인 진고도를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다 二年冬十一月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하다 三年冬十月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 三年冬十一月 고구려가 침입하다 五年春三月 사절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다 五年夏四月 흙비가 종일 내리다 六年 전염병이 크게 돌다 六年夏五月 땅이 갈라졌다가 다시 붙다 八年 비가 내리지 않아 굶주린 사람이 많이 발생하다 十年春二月 대궐 뜰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히다 十年夏四月 근구수왕이 죽다 == 대중매체에서 == === [[근초고왕(드라마)|드라마 근초고왕]] === ||<tablealign=center><width=500><:> [[파일:0507근초고왕-2.jpg|width=100%]] || ||<bgcolor=#DCDCDC,#1F2023><:> '''[[근초고왕(드라마)|드라마 근초고왕]]에서의 근구수왕''' || 배우는 아이돌 [[초신성(아이돌)|초신성]]의 멤버 [[건일]]. [[근초고왕(드라마)|드라마 근초고왕]]에서 후반부터 등장했다. 어이없게도 기록에 맞게 진씨 부인의 소생이 아니라 가상 인물 [[부여화]]의 소생이다. 게다가 부여화의 전 남편이었던 [[고국원왕]]이 친부라는 [[소문]] 때문에 궁궐 밖에서 지냈고 어릴 때 죽을 뻔해서 역사 [[왜곡]]과 사극 [[막장]]화의 중심으로서 공홈과 디시인사이드 갤러리 등에서 욕을 먹었다. 이름도 기록대로 수, 귀수, 휘수가 아닌 쇠꼬비에서 나중에 구수로 [[개명]]한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맹활약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이후 부여근이 태자 자리를 포기하고 진구를 따라 야마토로 떠나자, 홍란의 양자가 되어 [[백제]]의 [[태자]]가 된다. 고구려 정벌을 앞두고 아버지 [[근초고왕]]이 승하하자 오열한다. === [[천년의 신화]] === 백제 진영의 궁수 기병 [[영웅]]으로 등장하며 아버지 [[근초고왕]]이 재임하던 시절인지 태자라고 나온다. 3국 영웅 중에서는 [[마법]]까지 사용이 가능하다보니 나름 강력한 편. [각주] [[분류:생년 미상]][[분류:384년 사망]][[분류:백제 국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