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포장]][[분류:안동 권씨]][[분류:북구(포항) 출신 인물]][[분류:1921년 출생]] ||<-2><table align=right><bgcolor=white> [[파일:권중혁.jpg|width=300px]] || || 성명 ||권중혁(權重爀) || || 자 ||명우(明祐) || || 본관 ||[[안동 권씨]][* 복야공파 우전(禹銓)계 32세손 '''중(重)''' 종(宗) 인(仁) 무(武) 항렬.] || || 생몰 ||[[1921년]] ~ 현재 || || [[출생지]] ||[[경상북도]] 영일군 죽남면 입암동[br](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죽장면]] 입암리)[*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권대진]]도 이 마을 출신이다.][[http://w3devlabs.net/korea/archives/9422|#]] || || 추서 ||건국포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 생애 == 권중혁은 1921년 경상북도 영일군 죽남면 입암동(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에서 아버지 권대진(權大鎭)과 어머니 [[경주 이씨|월성 이씨]] 이종롱(李鍾巃)의 딸 사이의 1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보성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 20일, 그는 소위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에 의해 [[일본 제국 육군]]에 강제 징병되어 [[대구광역시|대구]] 제24부대[* 보병 80연대. 지금의 [[대구광역시]] [[남구(대구)|남구]] [[이천동(대구 남구)|이천동]] 캠프 헨리 부지에 위치해 있었다.[[https://m.blog.naver.com/bookhunt/110190690140|#]]]에 배속되었다. 이때 대구 24부대에 징집된 학병은 총 600여 명에 달했는데, 입대한 지 10일 쯤 뒤에 3대대 3중대 소속의 27명을 제외하고 모두 [[중국]] [[화북]]지방으로 보내져 이후 일본 제국 육군의 [[대륙타통작전]]에 이용당하였다. 한편, 27명에 잔류하게 된 그는 김이현(金而鉉)·[[문한우]]·[[권혁조]] 등과 함께 탈출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먼저 탄약고 폭파 및 무기탈취와 [[독극물]]에 의한 일본군의 몰살, 그리고 집단 탈출 후 국외로 나가 독립투쟁의 대열에 참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같은 무력항쟁 및 독살계획은 실행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았으므로 이들은 일단 집단 탈출을 시도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거사일인 그해 8월 8일 동지 6명은 하수구를 통하여 탈출에 성공한 뒤 대구 [[팔공산]]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이들의 탈출을 탐지한 일본 군경의 추격으로 그는 결국 [[영천시|영천군]] 신녕면 뒷산에서 체포되었다. 체포 후 3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2월 일본군 임시[[군법회의]]에서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일본]] [[기타큐슈]]의 [[고쿠라]](小倉)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 귀국하였으며,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2019년 현재 [[대구광역시]] [[달서구]]에 거주하고 있다.[[http://m.ksmnews.co.kr/view.php?idx=257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