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노론)] ||<-2><tablealign=right><table width=400><table bordercolor=#94153E><#94153E> {{{#fff {{{+1 '''권상하''' [br] 權尙夏}}}}}} || ||<-2><:>[[파일:권상하.jpg|width=100%]]|| ||<#94153E> {{{#fff '''본관'''}}} ||<(> [[안동 권씨]] || ||<|2><width=20%><#94153E> {{{#fff '''출생'''}}} ||<(> [[1641년]] || ||<(> [[서울특별시/역사|한성부]] || ||<|2><#94153E> {{{#fff '''사망'''}}} ||<(> [[1721년]] [[9월 2일]] (향년 80세) || ||<(> [[충청북도#역사|충청도]] [[청주시#역사]] || ||<#94153E> {{{#fff '''자'''}}} ||<(> 치도(致道) || ||<#94153E> {{{#fff '''호'''}}} ||<(> 수암(遂菴), 한수재(寒水齋) || ||<#94153E> {{{#fff '''시호'''}}} ||<(> 문순(文純) || ||<#94153E> {{{#fff '''가족관계'''}}} ||<(> 아버지 권격, 아들 권욱 || ||<#94153E> {{{#fff '''붕당'''}}} ||<(> [include(틀:노론(붕당))]([include(틀:호론)]) || ||<#94153E> {{{#fff '''붕당'''}}} ||<(> [[우의정]] || [목차] [clearfix] == 개요 == [[송시열]]의 수제자 중 한 명이자, [[산당]]의 2세대이고, [[예송논쟁]] 때 활약했다. == 생애 == 권격(權格)의 아들로 한성부 출신이다. 어린 나이에 시남(市南) 유계(兪棨), [[송시열]], [[송준길]]을 스승으로 모셨고, 유계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행하다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하에도 동시에 출입하여 배웠다.[* 동생 권상유는 그의 문하에서도 수학한다.] [[예송논쟁]] 때 [[송시열]]이 유배를 가자, 권상하 역시 관직의 뜻을 연연하지 않고 내려갔으나, 겨우 1년만인 1660년에 다시 돌아왔다. === [[송시열]] 사후와 [[갑술환국]] ===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되다 결국 사사될 때, 수많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송시열의 임종을 지켰다. 송시열을 그를 아꼈는지, 의복과 책을 자신의 마지막 선물로 주었다. 이때, 송시열은 ‘곧을 직(直)’ 자의 뜻과 [[효종(조선)|효종]]의 [[북벌|대의]]를 이어받아야 한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아무래도 수제자였던 만큼, 권상하는 송시열의 3년상을 지냈다. 이후 [[만동묘]]를 세워 명 황제들에 대한 제사를 지냈고, 숙종의 명을 받아 대보단 역시 세워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나라 병사들을 기념했다. 물러나서 초야에 머무르며 학문을 연구하고 교육에 힘썼다. 또한, [[서경덕]], [[이황]], [[기대승]], [[이이]], [[성혼]]등이 제기한 성리학 기본에 대하여 연구를 행했다. 한편으로는 [[허목]], [[윤증]] 등 송시열의 적이나 [[남인]]과 [[소론]]의 학문을 이단이라고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갔고, 순룽 참봉(順陵參奉),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 공조 정랑(工曹正郞),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장령(掌令), 집의(執義),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 시강원 진선(侍講院進善)과 종부시정(宗簿寺正)를 맡았다. [[송시열]]과 [[김수항]]의 사후 유지를 받들려고 [[단종(조선)|단종]], [[사육신]], [[생육신]] 등의 복권을 주장했다. === 계속되는 낙향 === [[갑술환국]] 때 관직을 사퇴했다 1698년에 호조 참의로 복직, 그리고 이조 참의로 승진해 세자시강원찬선(贊善)과 성균관 좨주를 겸했다. 다만 1701년 장희빈이 주도한 저주 사건으로 남인이 없어질 때 낙향한 것을 보면 이번에도 관직에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1703년 세자시강원 찬선, 1704년 특명으로 호조참판으로 승진,이조참판, 찬선을 거쳐 또 1705년 사퇴했는데, 대사헌에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퇴한 것이다. 1716년까지 해마다 대사헌으로 제수되지만 계속 거부했다. 7년만인 1712년, [[한성부판윤]]과 [[이조판서]]를 역임했고 5년 뒤엔 [[좌찬성]]으로의 승진 뒤 [[우의정]]이 되었다. [[좌의정]]에도 임명되었지만 거부하고 물러났다. 1716년에는 권상하의 스승 중 한 명인 유계와 [[윤선거]]가 같이 저술한 <가례원류>와 관련되어 논란이 일었다. 시간이 흐르고, 유계의 손자인 유상기는 자신의 스승이자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에게 책을 내고 싶다며 원고를 요구했으나, 매우 불괘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유상기는 아무런 설명 없이 [[이이명]]에게 부탁해 어명을 받았고, 윤증은 어쩔 수 없이 원고를 내줬다. 뒤에 모든 사정을 알게된 윤증과 유상기 사이에 편지가 오갔고, 윤증이 죽자 [[노론]]계인 그와 정호에게 발문과 서문을 부탁했다. 숙종은 소론, 윤증 편을 들었으나, [[병신처분]] 후, 권상하의 서문 역시 올려졌다. 5년 뒤인 1717년, 갑자기 우의정에 임명되어서 다시 은거하며 상소를 올렸는데, 숙종은 직접 비답(批答)을 써 내리고 사관에게 같이 오라고 명했다. 계속된 사양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결국 '백의(白衣)의 신분으로 들어와 볼수 있다'라고 예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왕의 노력에 '임금이 행궁(行宮)에 갈 때 호위하고 수행하는 의의'로 숙종을 알현했다. 또 얼마 안 되어 관직을 사양한 뒤 낙향했고, 좌의정으로 승진까지 되었으나 이번을 끝으로 다시 조정에 들어올 일은 없었다. === 사망과 학통 === 사망 직전 명예직인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음에도 나아가지 않았고, 얼마가지 않은 동년 8월 29일 사망한다. 학통은 외암 이간(巍巖 李柬),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 홍계희, 도암 이재, 임성주 등으로 이어졌다. 인물성편재문제(人物性偏在問題)로 논쟁이 일어나자, 그는 사망 전 한원진을 지지하며 송시열을 이어받은 기호학파는 [[호론]]과 [[낙론]]으로 양분되었다.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손동리에 안장되었다. 사후엔 노론의 영수로 꼽히며 삭탈관직이 되었으나, 영조 즉위 후 복권되고 시호까지 받았다. == 붕당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e9967a><tablebgcolor=#fff,#1f2023><rowbgcolor=#e9967a> '''{{{#fff 소속}}}''' || '''{{{#fff 기간}}}''' || '''{{{#fff 비고}}}''' || || [include(틀:서인(붕당))] || 1660년 - 1680년 || 입문 || || [include(틀:노론(붕당))] || 1680년 - 1721년 || 정치적 || || [include(틀:호론)] || 18세기 초반 - 1721년 || 학문적 || == 가족관계 == * 조부 : 권성원(權聖源) * 부 : 권격(權格) * 모 :함평 이씨[* 이초로(李楚老)의 딸] * 동생 : 권상명(勸尙明 1652-1684) * 동생 : 권상유(權尙游 1656-1724) * 부인 : 이씨(李氏)[* 이중휘(李重輝)의 딸] * 장남 : 권욱(權煜) * 손자 : 권양성(權養性) * 손자 : 권정성(權定性) [[분류:안동 권씨]][[분류:노론]][[분류:우의정]][[분류:이조판서]][[분류:1641년 출생]][[분류:1721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