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83년 출생]][[분류:경성군 출신 인물]][[분류:능성 구씨]][[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의 공산주의자]][[분류:소련/인물]][[분류:한국계 중화민국의 공산주의자]][[분류:193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 ||||<table align=right><bgcolor=white><:>[[파일:구연흠2.png|width=300px]][* 1930년 2월 10일 촬영된 사진.] || || 성명 ||구연흠(具然欽) || || 이명 ||구창해(具滄海)·구창애(具蒼崖)·강재후(江載厚) || || 본관 ||[[능성 구씨]][* 24세 연(然) 항렬.][[http://db.history.go.kr/id/im_101_00639|#]] || || 생몰 ||[[1883년]] [[10월 6일]] ~ [[1937년]] [[2월 28일]] || || [[출생지]] ||[[함경도]] 경성도호부 주촌면 용전동[br](현 [[함경북도]] [[어랑군]] 용전리)[[http://db.history.go.kr/id/ia_0296_0208|#]] || || 사망지 ||[[경성부]]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항일운동가.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 조선 및 대한제국 시기 === 구연흠은 1883년 10월 6일 함경도 경성도호부 주촌면 용전동(현 함경북도 어랑군 용전리)에서 북병사 겸 경성도호부사를 지낸 구준현(具駿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7HIL_A1883_1_0025471|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에는 경기도 양주 출신의 아버지가 철원군수를 지낸 관료라고 한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에 [[고종(대한제국)|고종]]·[[순종(대한제국)|순종]] 대에 철원부사 또는 철원군수를 지낸 관료 중에 [[구(성씨)|구씨]]는 없으며, [[http://db.history.go.kr/id/ia_0296_0208|193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출생지가 함경북도 경성군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적지가 [[경기도]] [[양주시|양주군]]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상경하여 [[한성부]] 중부 경행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에 살면서 본적을 두었으며, 이후 북서 광화방 원동(현 종로구 [[원서동]]), 북서 자하동 간곡(현 종로구 [[창성동(서울)|창성동]]), 북서 가회방 재동계 맹현(현 종로구 [[가회동]]) 등에 거주했다.[[http://db.history.go.kr/id/im_101_00639|#]] 그는 어려서 집안 글방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1900년 11월 21일 [[궁내부]] 시종원우시어(侍從院右侍御)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906년 4월 24일에는 지방조사위원(地方調査委員), 같은 해 10월 23일 내부주사(內部主事)에, 1907년 6월 20일 내부서기랑(內部書記郞)에 임명되었으며, 1908년에는 내부(內部) 본청 지방국 지리과 주사(主事)[[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2&totalCount=2&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5%85%B7%E7%84%B6%E6%AC%BD&brokerPagingInfo=SnUpYrZZuHIxMzHLMdPQRSiRQABToXWGHZuCCxKLaPcKOPgSTUVl0n0p&selectedTypes=&selectedSu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5%85%B7%E7%84%B6%E6%AC%BD&searchKeywordConjunction=AND|#]]로 근무하는 등 구한말 [[대한제국]]의 관료 생활을 했다. === 일제강점기 === [[경술국치]] 후에는 농업에 종사하다 1919년 가을 <만주일보>의 [[선양시|봉천]] 지국장을 지냈다. 1920년대 초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항일운동에 투신하게 되었으며, 1922년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 1923년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에 가입하여 민족 계몽과 일제 식민지배를 타도하기 위한 항일운동에 진력했으며, 1924년 [[동아일보]] 지방부장을 지냈고, 1925년 <시대일보> 영업국장 및 논설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신문기자 단체인 무명회(無名會)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공산주의 단체인 화요회 그룹과 연관이 있는 불꽃사(火焰社)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1925년 6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중앙검사위원이자 혁명자후원회 위원이 되었고, 3월에는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될 만큼 핵심역할을 담당하였다. 1927년 3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모플 제2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모스크바에서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1927년부터 크게 일어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적극 참여해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에 가입하는 한편, 1927년 9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장쑤성]]위원회 법남구 한인지부에서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1929년 6월 대만·일본 등의 반제운동가들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주비회를 결성했으며, 같은 해 11월부터 총무부 비서로 활동하였다.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가 해체되자,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의 총무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기관지 <앞으로>를 발행하는데 참여했다. 1929년 11월 국내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이에 호응해 학생운동을 선전하고자 상하이 각 단체 연합회를 결성하고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주비회의 이름을 내걸고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대중적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에는 상하이 [[3.1 운동]] 기념시위, [[6.10 만세 운동]] 기념 시위, [[경술국치|8.29 망국]] 기념 시위 등을 주도했다. 1930년 9월 [[충청북도]] 청주경찰서에 검거된 구연흠은 곧 경성부로 압송되었으며,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10월 20일 대전형무소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1935년 12월 만기출옥 했지만 고문으로 생긴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37년 2월 28일에 사망했다. == 기타 ==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구연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