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 ||<-2><tablealign=right>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J0113-0500-001%2C_Gustav_Bauer.jpg|width=300]] || || '''풀네임''' ||'''Gustav Adolf Bauer''' (구스타프 아돌프 바우어) || || '''출신 정당''' ||[include(틀:독일 사회민주당)] || || '''생몰년''' ||[[1870년]] [[1월 4일]] ~ [[1944년]] [[9월 16일]] || || '''재임기간''' ||[[1919년]] [[6월 21일]] ~ [[1920년]] [[3월 26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바이마르 공화국]]의 두번째 총리. 각종 사회보장 제도를 도입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어려웠던 독일 국민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자 시도했지만 전후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으로 인해 총리로는 단명하고 말았다.[* 딱 219일 재임했다(...)] == 생애 ==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 근교에서 1870년 출생하였다. 실업학교를 졸업한 이후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였으며[* 변호사는 아니었다. 그냥 말 그대로 사무실 직원으로 근무하였을 뿐. ~~애초에 변호사면 부르주아인데 부르주아가 사민당에서 활동할 가능성이...~~] 사무원 [[노조]]의 대표자로 활동하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1912년]] [[슐레지엔]] [[브레슬라우]]에서 사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제국의회]] 진입에 성공하였으며, 원내 활동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독일 제국]]의 전쟁 수행 지지여부를 놓고 사민당은 사분오열하지만, 바우어는 굳건한 에베르트의 지지자로 남아있었으며, [[1918년]] [[11월 혁명]]으로 왕정이 붕괴된 뒤 뒷수습을 위해 제국 총리에 오른 에베르트는 바우어를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그간의 지지에 보답한다. 이후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고 [[필리프 샤이데만]]이 총리직에 오르지만[* 에베르트는 대통령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에 상관없이 바우어는 노동부 장관 자리를 유지한다. ~~애초에 바우어 본인이 주 40시간 근무, [[건강보험]], [[보통선거]] 보장 등의 개혁책을 도입하면서 인기가 좋기도 했고~~ 하지만 샤이데만은 취임한 지 불과 넉달만에 [[베르사유 조약]] 승인을 거부하면서 총리직에서 사퇴해버리고 ~~똥을 치우는 담당으로~~ 바우어가 그 뒤를 이어 제국총리에 오르게 된다. 바우어 내각은 울며 겨자먹기로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할 수 밖에 없었고, 덕분에 바우어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추락하게 된다. 어쨌든 바우어는 지옥과 같았던 종전 직후 독일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각종 개혁을 단행하였고, 부유세 도입/ 실업급여 지급 / 출산지원과 같은 당대 상황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정책이 수반된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을 위해서는 국가의 튼실한 재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만한 상식인데, 전후 독일은 전쟁배상금 문제로 인하여 완전히 빈털터리였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바우어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재정장관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가 1919년 10월 정치적 극단주의 세력에게 암살당하면서 개혁은 완전히 추진력을 잃고 만다. 안 그래도 위태롭던 바우어 내각의 숨통을 끊은것은 1920년 3월에 일어난 [[카프 폭동]]이었다. 대통령 에베르트까지 나서서 노동자들에게 폭동에 대항하는 총파업을 호소한 끝에 폭동을 간신히 수습됐지만 바우어의 지도력 역시도 사실상 끝장이 났고 결국 바우어는 3월 27일에 사임한다. 그리고 그 뒤로는 [[헤르만 뮐러]]가 총리에 임명된다.[* 하지만 헤르만 뮐러는 뭘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총선에서 참패하고 3달이 채 안되어서 총리직에서 물러난다. 애초에 베르사유 조약을 승인한 것 자체만으로 독일 국민들은 사민당에게 등을 돌린 상황이기도 했고.] 이후로도 바우어는 의원직을 유지하면서 [[헤르만 뮐러]] / [[요제프 비르트]] 내각에 참여하였으나 1925년 뇌물 스캔들에 연루되어 당에서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1년뒤 출당조치가 해제됨에 따라 사민당에 복귀하기는 했지만 바우어 본인의 정치 생명 자체는 끝장난 것과 진배없었고 본인 역시 정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후 1933년 [[나치]]가 집권하고 [[수권법]]이 통과됨에 따라 사민당의 중진 출신이었던 바우어 역시 나치의 표적이 됐고 공금 횡령 혐의로 같은 해 6월 나치에게 체포됐다. 하지만 증거불충분[* 이 과정이 무척 골때리는데, 애초에 공금 횡령의 증거로 제시된 것이 바우어의 아들의 진술이었다. '''그런데 바우어는 결혼은 했지만 자식이 없었다'''(...) ~~나치가 얼마나 일단 정적들을 무작정 잡아넣고 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으로 곧 석방됐으며 이후 바우어는 은둔하다가 1944년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난다. [[분류:독일 제국의 정치인]][[분류:바이마르 공화국 총리]][[분류:1870년 출생]][[분류:1944년 사망]][[분류:사회민주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