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align=right><tablewidth=420><tablebordercolor=#878787><colbgcolor=#878787><colcolor=#ffffff> '''성명''' ||고용진(高龍鎭) || || '''자 / 호''' ||운서(雲瑞) / 송재(松齋) || || '''본관''' ||[[고(성씨)|장흥 고씨]][* 19세 진(鎭) 항렬.] || || '''생몰''' ||[[1850년]] [[10월 1일]] ~ [[1922년]] [[2월 26일]] (향년 71세) || || '''출생지''' ||[[전라도]] 흥덕현 일남면 가평리[br](현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고(성씨)|장흥 고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고석진]]과 [[고제천]]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850년 10월 1일 전라도 흥덕현 일남면 가평리(현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장 [[고경명]]의 후예이며 독립유공자 [[고예진]]의 사촌 형이다.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이 [[을사조약]] 체결에 반발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열어 태인 일대의 유생들을 규합했을 때, 고용진은 [[강종회]] 등 포수 30여 명을 거느리고 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최익현의 의병이 끝내 패하자 고향에 잠적했다. 1913년 9월 [[임병찬]]이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각도에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할 떄, 고용진은 다시 참가했고 1914년 2월 고종으로부터 종품 가선대부 독립의군부 회계총관으로 임명되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제가 독립의군부의 정체를 간파해 임병찬 등 지휘부를 모조리 잡아들이면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자 낙담한 채 고향에 은거했다. 이후 1919년 4월에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해 호남지방 유림서명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 2월 26일에 사망했으며, 송천집(松川集)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고용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장흥 고씨]][[분류:고창군 출신 인물]][[분류:1850년 출생]][[분류:1922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