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 align=right><bgcolor=white> [[파일:고영호.jpg|width=300px]] || || 성명 ||고영호(高瀛豪) || || 일본식 성명 ||高原房雄 || || 이명 ||고영호(高瀛濠) || || 본관 ||[[고(성씨)|제주 고씨]] || || 생몰 ||[[1920년]] [[12월 16일]] ~ [[2004년]] [[2월 24일]] || || [[출생지]] ||[[전라남도]] 제주군 구우면 한림리[br](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한림리)[* 인근의 귀덕리·수원리·명월리·금악리·옹포리·협재리·금능리·상명리와 함께 [[고(성씨)|제주 고씨]] 집성촌이다.] || || 사망지 ||[[제주도]] [[제주시]]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 생애 == 고영호는 1920년 12월 16일 전라남도 제주군 구우면(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한림리에서 고성현(高成鉉)의 아들로 태어났다.[[https://www.jeju.go.kr/vill/hanrim1/intro/people.htm?act=view&seq=1152771|#]] 그는 1934년 구우공립보통학교(현 한림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6학년 때 일본인 교장 나카야마 시게요시(中山重義)가 조선어 사용을 억제하는 것에 항의하다 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심상고등소학교에서 공부하며 노동을 병행했는데, 이때 노동 현장에서 조선인에 대한 극심한 차별을 체험한 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었다. 1942년 심상고등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해 4월 동창생 윤병윤(尹炳允)·한종치(韓宗治)·정진환(鄭鎭煥)·하백문(河伯文)·이행철 등과 함께 오사카의 한 자택에서 조국 광복에 나서기로 서약하고 조선독립청년단을 결성했다. 1942년 6월, 그는 조선독립청년단 회합에서 비밀을 엄수할 것, 민족 의식을 앙양하는 운동을 펼칠 것 등을 결의하였다. 또한 한국 내의 애국 동지와 종교계 인사들과 연계하고, 나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원과도 접촉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43년 2월 [[고베시]]의 한 저택에서 회합을 가지고 있을 때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고영호는 극심한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1944년 1월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45년 7월에 만기 출소했다. [[8.15 해방]] 후, 고영호는 1945년 10월 초 [[오사카]]에서 열린 한민족 궐기대회에 참석했으며, 1947년 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서울에서 사업을 하던 중 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에 참전했다. 하지만 전투 도중 몸에 박힌 파편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았고, 완쾌 후 일본 내에서 여러 회사에 근무했다가 1984년 제주시로 귀향했다. 이후 여생을 조용히 보내다 2004년 2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고영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4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제주시 출신 인물]][[분류:제주 고씨]][[분류:1920년 출생]][[분류:200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메이지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