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신사(신토)]][[분류:사이타마현]] ||<tablealign=right><tablewidth=400px><tablebordercolor=#504c4b><tablebgcolor=#504c4b><-2><:>{{{#ffffff {{{+1 '''[ruby(高麗, ruby=こま)][ruby(神, ruby=じん)][ruby(社, ruby=じゃ)]'''}}}[br]고마 신사 | Koma Shrine}}}|| ||<-2><bgcolor=#ffffff,#000000><:>[include(틀:지도, 장소=高麗神社, width=100%, height=100%)]|| ||<width=85px><:>{{{#ffffff '''소재지'''}}}||<bgcolor=#ffffff,#000000><:>[[사이타마현]] [[히다카시]] 니호리 833[br](埼玉県日高市新堀833)|| ||<:>{{{#ffffff '''제신(祭神)'''}}}||<bgcolor=#ffffff,#000000><:>[[약광|고마묘진]](高麗明神)[br]사루타히코노미코토(猿田彦命)[br][[타케우치노 스쿠네|타케우치노스쿠네미코토]](武内宿禰命)|| ||<:>{{{#ffffff '''사격(社格)'''}}}||<bgcolor=#ffffff,#000000><:>구 현사(県社)[br]별표신사(別表神社)|| ||<:>{{{#ffffff '''창건'''}}}||<bgcolor=#ffffff,#000000><:>불명|| ||<:>[[예대제|{{{#ffffff '''예대제'''}}}]]||<bgcolor=#ffffff,#000000><:>10월 19일|| ||<:>{{{#ffffff '''홈페이지'''}}}||<bgcolor=#ffffff,#000000><:>[[http://komajinja.or.jp/]][br][[http://www.komajinja.or.jp/korean.html|(한국어 페이지 보기)]]|| [목차] == 개요 == 고마 신사는 [[일본]]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에 있는 [[신사(신토)|신사]]이다. [[고구려]] [[보장왕]]의 후손으로 전하는 [[약광]](若光)을 모신다. 약광을 모시는 절인 쇼덴인(聖天院, 성천원)[* 쇼덴인과 고마 신사는 본래 하나의 건물로 취급 받았으나, 메이지 시대의 신불판연령으로 분리되었다.][* 쇼덴인에는 재일교포 사업가가 세운 재일한민족무연지령탑과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신라의 태종무열왕, 백제의 왕인 박사, 고려의 정몽주, 조선의 신사임당, 그리고 단군왕검의 동상과 한국식 팔각정이 있다.] 이 이웃해 있다. == 상세 == >스루가, 가이, 사가미, 카즈사, 시모사, 히타치, 시모스케의 7국 고려인 1799명을 [[무사시|무사시국]]으로 옮겨서 처음으로 고마군(高麗郡)을 두었다. >----- >[[속일본기]] 권7 겐쇼 덴노, 레이키 2년(716) 5월조[[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jm&levelId=jm_002r_0070_0010&types=r|#]] 고마 신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속일본기]]에는 716년 히다카시 일대에 군(郡)을 설치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모여 살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약광이 이곳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었던 듯하다. 약광의 후예로 신사를 지켜 온 고마 가문의 기록에 따르면 약광은 748년에 사망했으므로 그 무렵 사당을 조성했다고 추정한다. 현재는 약광의 60대손 [[고마 후미야스]]가 궁사이다. 고마군이 설치된 5월 16일에는 매년 고구려 의상 퍼레이드 등의 행사를 연다. 고마군 건군 1300주년인 2016년에는 기념비를 세우는 등 성대한 행사를 열었다.[[http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425027030|#]] ||[[파일:koma02.jpg|width=400]]||[[파일:koma01.jpg|width=400]]|| |||| 고마 신사의 장승과 에마 || 한국에서 관심이 상당한 편이다. 신사로 들어가다 보면 돌로 된 [[장승]] 둘이 서 있는데 [[민단]]에서 기증한 것들이다. 원래 목장승을 세웠다가 자동차 사고로 손상되자 돌로 만들어 다시 세웠다. [[에마#s-2|에마]]에도 장승이 그려졌을 정도로, 신사의 마스코트 비슷한 취급을 받는 듯하다. 한켠에는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가 심은 나무가 있다. [[주일대사]]들은 관례적으로 방문하는 듯하며, 한일 문화 교류 행사차 한국 연예인들이 찾아간 사례도 있다.[* 관련 자료: [[http://www.mindan.org/old/front/newsDetaildac4-2.html?category=2&newsid=11315|2009년 권철현 대사]][[http://overseas.mofa.go.kr/jp-ko/brd/m_1053/view.do?seq=1136740&srchFr=&srchTo=&srchWord=&srchTp=&multi_itm_seq=0&itm_seq_1=0&itm_seq_2=0&company_cd=&company_nm=|2015년 유흥수 대사]][[http://komagun.jp/2013/0404/801|2013년 배우 지창욱]][[http://komagun.jp/2014/0408/1678|2014년 배우 조현재]]] 신사에서 키우는 고양이의 이름은 나비냥인데, 한국에서 고양이의 이름을 나비로 많이 짓는 것에서 따온 듯 하다. 신사 본전 앞 대문에 걸린 편액에는 高,,,句,,,麗神社라고 쓰여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중응]]이 남긴 것으로,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句를 작게 써 넣은 것이라고 한다. 출세를 하려면 꼭 참배해야 하는 곳으로 꼽혀 유력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곳을 참배하고 [[일본 총리]]가 된 사람들로 [[사이토 마코토]], [[와카쓰키 레이지로]], [[하마구치 오사치]], [[히라누마 기이치로]], [[하토야마 이치로]], [[고이소 구니아키]]가 있다. 2017년에 [[아키히토]] 덴노 내외가 고마 신사를 방문해 참배했다. [[나루히토]] 덴노는 고등학생 때 방문한 적이 있다.[[https://news.joins.com/article/22111515|#]] == 근현대의 고마 신사 == 고마 신사는 근대까지만 해도 지방의 토속 신사 중 하나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메이지 시대 들어 신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것은, 근대화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도래인]]과 일본에 성공적으로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고마 신사가 [[내선일체]]를 강조하기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1886년 지역 가계도와 고문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고마 신사와 한국과의 인연이 알려지자 일본 정부와 학계에서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일본에 망명해 있던 [[조중응]]은 1900년에 이곳을 방문해 신사의 내력을 확인하고 현판까지 써 주었다. 한국에 고마 신사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16년 [[매일신보]]에 소개되면서였다.[* [[http://lod.nl.go.kr/home/include/lodpopup.jsp?uri=http://lod.nl.go.kr/resource/CNTS-00094018118|내지의 고려촌(1), 풍물이 상금방불, 『매일신보』, 1916.8.30]]]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 방침을 세운 후 '내지 시찰단'의 명목으로 일제에 협조적인 조선의 유력 인사를 일본으로 보내 선전에 이용하곤 했는데, 이 시찰 코스에 고마 신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1921년 대구에서 출발해 일본 각지를 훑고 돌아온 경상북도 유림 시찰단은 다음의 감상을 남겼다. >고려촌(高麗村)[* 고마군은 1896년 이웃한 군에 합병되어 [[시정촌#s-2.3|촌]] 단위 행정구역이 되었다.]에 도착하니 길거리에 남녀노소가 나와 맞아 주었다. 그들은 마치 멀리 있어 오래 보지 못한 친척을 만난 것처럼 기뻐하였다. (중략) 성천원(聖天院) 동쪽에 약광왕의 신사와 비각이 있다. 단원 일동이 신사에 참배할 때 흥환(興丸)씨[* 약광의 57대손인 고마 오키마루.]가 조선 사람들이 와서 참배한다는 내용의 글을 바쳤다. 도중에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지라 우리 단원들도 따라 눈물을 흘렸다. >----- >『경상북도유림내지시찰감상록(慶尙北道儒林內地視察感想錄)』 1940년 4월 고마 신사와 [[조선신궁]]은 서로 나무를 교환했다. 고마 신사에서는 [[벚나무]]를, 조선신궁에서는 [[잣나무]]와 [[개나리]]를 기증했다. 매일신보는 이 행사를 [[https://lod.nl.go.kr/page/CNTS-00095014187|내선일체의 신목(神木)교환]]이라는 제목을 붙여 보도했다. 6월에는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이 찾아 참배했는데, 이 때의 기사에서도 고마 신사를 '내선일체의 산 교훈'이라고 쓰고 있어 고마 신사가 당시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알 수 있다. >미나미 총독은 바쁜 시간을 쪼개어 8일은 내선일체의 산 교훈으로 이름 높은 고려신사를 참배하였다. 고려신사 신전에 올라 경건한 참배를 마치고 기념식수를 한 후 사무소 응접실에서 아라이(新井) 고려촌장, 고마 아키쓰(高麗明津)[* 약광의 58대손.] 사장(社掌)[* 신사에서 제사를 맡는 신관의 직위.]을 위시하여 촌 유력자 10여 명과 간단한 오찬회를 열었다. > 미나미: "조선은 와 본 일이 있소?" > 고마: "없습니다." > 미나미: "고향을 못 보았다니! 허허. 한번 꼭 오시오." >----- >[[https://lod.nl.go.kr/page/CNTS-00095026496|"고향에 한번 오시요" 내선일체의 땅, 고려촌을 방문하여 따뜻한 대화. 미나미 총독, 고려신사 참배, 『매일신보』, 1940.6.11]] 1942년 11월에는 [[영친왕]]과 [[이방자]] 내외, 아들 [[이구(1931)|이구]] 가족이 방문했다. 이방자와 이구는 이듬해 43년에도 재차 참배했다. == 찾아가는 길 == [[JR 히가시니혼|JR]] [[코마가와역]]에서 도보로 약 20분 정도 걸린다. [[세이부 철도]] [[코마역(사이타마)|코마역]]에서는 도보 45분. 코마역에서 코마가와역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중간에 내려서 걸어갈 수도 있다. 역에서 신사 바로 앞까지 가는 대중교통은 딱히 없으니 그냥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