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MuddledWrongSwelteringBox, 합의사항1=본문의 표제어를 고구려-백제 관계로 변경하는 것)] ||<table align=center><bgcolor=#fff><tablebordercolor=#ddd><table width=100%><-7><:> '''{{{#000,#ddd 고구려-백제 관계 관련 틀}}}''' || ||<-7><:><#fff,#2d2f34>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한국의 역사)] ---- [include(틀:고구려의 대외관계)] ---- [include(틀:백제의 대외관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를 다루는 문서이다. == 역사 == === 초기 === 백제의 창업군주인 [[온조왕]]과 [[동명성왕]]의 관계는 여러 전승이 있지만, 온조가 고구려에서 왔다는 것에 대한 높은 가능성은 변치 않는다. 어쨋든, 나라가 세워진 이후 두 나라의 초창기 때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일단 [[한사군]]이 막고 있었으며, [[옥저]]와 [[동예]]도 위치해 건국 초기 압록강과 두만강 위쪽에 있던 고구려가 한반도 중심부에 있던 백제와 교류할 수 없었다. 백제 2대 국왕 [[다루왕]]부터 8대 국왕 [[고이왕]]까지 직접적인 교류, 충돌은 없고,[* 그나마 낙랑태수가 [[위나라]]의 장군들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서 고이왕이 낙랑군을 공격한 정도?] 제9대 국왕 [[책계왕]] 때부터 시작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대방군|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자 구원을 요청해[* 삼국사기에 따르면 책계왕의 아내는 대방왕의 딸 보과였다고 한다. 일단 [[대방군]]으로 추측 중.]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온조왕 이후 접점이 없던 두 나라가 맞붙은 첫번째 기록이다. 이 사건 17년 후, 고구려 [[미천왕]]이 한사군 중 한반도 내에 남아았던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하여 멸망시키면서 두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갈등이 시작된다. === 중기 === 백제의 최전성기인 제13대 국왕 [[근초고왕]] 때, 두 나라가 전쟁을 시작한다. 고구려는 북서쪽인 [[요동]] 지방의 [[전연]]이 너무 강해 그쪽으론 영토를 넓힐 수 없어 떠오르는 백제를 공격하기로 한다. [[고국원왕]]은 친히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치양을 기습 점령한다. 이후 벌어진 전투가 [[치양 전투]]로, 양 국간의 직접적인 물리적 충돌이 처음으로 역사에 기록된 전투이다. 이때, 고구려를 배신한 사기의 말을 듣고 백제는 붉은 깃발의 군대를 집중 타격했고, 저들이 정예 군대였는지 고구려군은 대패한다. 2년 뒤, 두 나라는 [[평양성]]에서 다시 맞붙는다. 이 전투를 [[평양성 전투(371년)|평양성 전투]]라 일컫는다. 백제는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고국원왕]]이 백제의 눈 먼 화살에 눈을 맞아 죽는 등 엄청난 전과를 올렸으며, 이 전투로 대동강 주변까지 영향력이 미치게 되지만, 고구려는 정복전쟁을 중단하고 피해 복구에 열중하게 된다. 이 전투 후에도 두 나라는 국경에서 계속 싸운다. 결국 [[광개토대왕]]이 즉위하자, [[진사왕]]의 백제는 지금의 황해도와 경기 북부를 잃고, [[아신왕]] 때는 백제가 군사를 일으킬 때마다 발렸다. 이후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최전성기 때,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아직도 백제의 굴욕은 끝나지 않았는지, 21대 국왕 [[개로왕]]은 [[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쳐달라 하다가 3년 뒤, 위례성에서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탈출하다 참수된다. [[장수왕]]이 죽은 뒤, 고구려는 [[나제동맹]] 및 [[가야]]의 연합 격퇴에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거의 10년 이상 같은 지역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고구려]]는 중흥군주 [[무령왕]]의 등장에 현재의 고양시까지 영토가 밀리게 되었다. === 후기 === [[나제동맹]]은 한강 지역 공격 이후 깨졌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가 회복된 것은 아니였다. 백제는 [[양나라]]와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협공하자고 제안까지 했고, 고구려는 성왕 사후 불과 3개월만에 다시 백제로 쳐들어왔다. ==== 여제동맹? ==== 7세기, 더 구체적으로는 642년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막기 위해 세워졌다는 동맹으로, 그 증거는 구당서 백제전에 있으나,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642년 의자왕은 신라를 치는 동시에 고구려에겐 화친을 제안했고, [[당항성]]을 공격해 신라의 사신이 당에서 원조를 구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에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나당 중 한 나라가 자신의 나라를 공격하면, 여제 중 한 나라는 나당 중 다른 나라를 공격해 앞뒤로 전쟁을 벌이는 일을 없게 하자며 맺었다고 한다. 또한, 여제동맹은 백제가 망한 660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태종 무열왕|김춘추]]는 백제의 공격에 도움을 청하러 고구려에 갔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여제가 동맹을 맺었다면, 김춘추는 청병 시도조차 못 했을 것이다. 또한, 여제가 동맹을 맺었다고 나온 책인, 구당서, 신당서와 삼국사기 모두 신라의 대당 외교문서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김춘추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다 실패한 후 여제동맹이 맺어졌을 가능성 또한 있으며 설령 동맹을 맺지 않았다고 해도 당시 백제의 영토가 신라에 감싸져있는 형태였기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싸우지 않고 신라와 싸우는 상황이었던건 같다. 학계는 신라가 [[나당연합군|나당동맹]]을 빨리 이루려고 조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종결 === 삼국 중 백제가 660년 신라와 당의 공격으로 멸망하며 관계가 끊어졌고, 고구려 역시 8년 뒤 두 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며 두 나라의 관계는 끊어졌다. == 관련 사건 == * 여제동맹 * [[삼국통일전쟁]] == 같이 보기 == * [[나제동맹]] * [[나제관계]] [[분류:고구려]][[분류:신라]][[분류:삼국시대]][[분류:과거의 외교 관계]][[분류:나무위키 외교 프로젝트]][[분류:나무위키 한국사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