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대한민국의 음악가]][[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문화, 예술]][[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문화]][[분류:수안 계씨]][[분류:1904년 출생]][[분류:1974년 사망]][[분류:평양직할시 출신 인물]] [[파일:external/dbscthumb.phinf.naver.net/e0d5cfdf-ca0d-42.jpg?type=m250_fst_nce&wm=Y.jpg]] 桂貞植 [[1904년]]~ [[1974년]] [[10월 3일]] [목차] == 소개 == [[한국]]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 [[일제강점기]] 바이올린 연주가·지휘자였으며 [[평양]] 출생.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을 역임하고 [[일본]] [[도쿄]] 동양음악학교(東洋音樂學校) 및 [[독일]]뮌헨예술대학 졸업. 철학박사를 취득하였으며 고려심포니 및 서울심포니 창립·지휘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 우익 계열 음악인의 대표격인 [[현제명]]이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자 참여하여 창립음악회의 지휘자를 맡았다. 고려교향악단은 군정장관 아서 러치가 명예회장을 맡았을 만큼 미군정과 가까운 관계였다. 1945년 이영세를 위원장으로 여러 계열이 연합해 조직한 조선음악가협회 이사를 지냈고, [[1944년]]에 [[동성고등학교#s-8|동성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했다. 1946년에는 대한연주가협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고려교향악단에서는 [[1946년]] 탈퇴한 뒤 김생려 등 탈퇴파들과 함께 서울관현악단(서울교향악단의 전신)을 조직하여 미군 부대를 근거로 활동을 했다. 1956년 7월 24일 한국음악단체연합회(韓國音樂團體聯合會) 창립 대연주회 때 출연하였다. 1957년 설립한 아카데미3중주단의 멤버였다. 1957년 5월 김종명(첼로)·김동성(피아노)과 함께 아카데미3중주단의 창단연주회를 개최했으며, 5월 17일 아카데미3중주단의 제3회 연주회 때 출연했고, 5월 18일 아카데미3중주단의 첫 연주회 때 출연하였다. [[1961년]] [[미국]]으로 가서 1974년 사망하였다. == 친일 논란 ==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조선총독부]]가 후원해 열린 조선음악경연대회에 양금부 심사위원으로 참가했고, 대화숙 안에 설치된 경성음악연구원에서 강의하는 등 친일 행적이 있다. 1941년 총독부가 지휘해 결성된 친일단체인 조선음악협회에도 이사로 참여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