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희궁)] [include(틀:조선 왕궁의 편전 정문)] ||<table width=750>[[파일:경희궁 자정문.jpg|width=100%]] || || 발굴조사와 연구를 통해 복원한 자정문의 모습 || [목차] == 소개 == {{{+1 慶熙宮 資政門}}} [[경희궁]]의 [[편전]] [[경희궁 자정전|자정전]]의 [[정문]]이다. 경희궁 정전 [[경희궁|숭정전]]의 서북쪽 뒷편에 있다. '자정(資政)' 뜻은 '정사(政)를 돕는다(資)'이다.[[http://egloos.zum.com/q8imcs/v/10680742|#]] 현재 [[현판]]은 서예가 송천 정하건 선생(松泉 鄭夏建. 1939 ~ )이 썼다.[[http://songchun.co.kr/board_ljfo93/3320|#]] == 역사 == 1620년(광해군 12년) [[경희궁]] 창건 때 지었다. 처음 지은 후 [[화재]] 한 번 겪지 않고 260년 간 별 탈 없이 존재하다 1865년([[고종(대한제국)|고종]] 2년) [[경복궁]] 중건 시 경희궁을 헐어 경복궁 공사의 자재로 쓸 때 헐렸다. 흔히 [[일본 제국|일제]]가 없앴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근거는 아래 기록이다. > 서궐(경희궁) 내에는 '''[[경희궁 숭정전|숭정전]], [[경희궁 회상전|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경희궁 흥정당|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하였다. >---- >《경복궁 중건일기》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 1901년([[광무]] 5년)에 숭정전을 찍은 사진을 보면, 자정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자정문이 없다. 이로 보아 아무리 늦어도 그 이전에 이미 철거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table width=662>[[파일:P1060512.jpg|width=100%]]|| || 1901년 이전에 촬영된 경희궁 숭정전 사진 ([[프랑스어]] 교사인 [[샤를 알레베크]]가 제작한 사진 엽서의 사진)[* [[https://namu.wiki/w/파일:알레베크%20사진엽서%20경희궁%20숭정전.jpg|사진엽서 전체의 모습.]] ] || [[일제강점기]] 이후 일제는 자정문 터에 경성중학교 교사를 세웠다. 8.15 광복 후에는 [[서울고등학교]]가 사용하다가 1990년대 [[경희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교사를 철거하였다. 그 뒤 발굴 조사를 거쳐 1998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복원 공사 중인 [[경희궁 자정전|자정전]]의 [[사진]]을 보아 자정문 공사가 자정전보다 먼저 끝난 듯 하다. ||<table width=662>[[파일:복원 공사 중인 자정전.png|width=100%]]|| || 복원 공사 중인 [[경희궁 자정전|자정전]]. 왼쪽 사진은 북쪽에서, 오른쪽 사진은 남쪽에서 바라 본 모습. || == 특징 == * [[경희궁]] 자체가 원래 [[궁전|이궁]]으로 잠시 머물 목적으로 지은데다 산자락이란 [[지형]]의 한계 때문인지 일반적인 [[편전]] [[정문]]의 배치와는 좀 다르다. [[경희궁 숭정전|숭정전]] - [[경희궁 자정전|자정전]] 축에서 서쪽으로 치우쳐있다. 또한 숭정전과 자정문 사이의 길이 굉장히 가파르고 폭이 좁다. 이런 지형은 훗날 [[경종(조선)|경종]] 즉위 초에 자정전에 모셨던 선대왕 [[숙종(조선)|숙종]]의 재궁[* 梓宮. [[임금]]의 [[관]].]을 발인할 때 문제가 되었다. 이는 자정문부터 숭정전 내부까지 [[흙]]으로 메워(...) 길을 만들어 해결하였다.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자정문(資政門)|#]] * 하지만 산자락의 [[지형]]을 역이용해 [[기단]]을 높임으로써 [[편전]] [[정문]]의 위엄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다른 [[궁궐]]의 편전 정문들은 [[기단]]과 [[계단]]이 없거나 있어도 높지 않고 소박한 형태이지만, 자정문의 기단은 무려 장대석을 7단이나 쌓은 높은 기단이고, 계단도 무려 8단이며, 계단 가운데에 [[봉황]]을 새긴 [[답도]]를 놓고, 소맷돌 아래 끝 부분에 [[서수]]를 [[조각]]해서 화려하게 꾸몄다. * 원형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올린 뒤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정면 3칸, 측면 2칸, 총 6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또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양상바름한 뒤, 2개의 취두와 4개의 [[용두]], 그리고 동, 서 양쪽의 추녀마루 위에 4개의 [[잡상]]과 각 처마 끝에 토수를 놓았다. 평방 없이 창방 위에 바로 [[공포]]를 놓은 형태로 공포는 익공 양식이며 공포 사이마다 화반 1개 씩을 두었다. 이는 [[경희궁 자정전|자정전]]과 비슷하나 자정전과 달리 공포와 화반 사이를 [[벽]]으로 메꾸지 않고 트이게 하였다. *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다. 가운데 [[왕]]이 다니는 어칸(御間)을 조금 더 높게 만들었으며, 양 측면의 칸 마다 중인방을 끼우고 위, 아래 --[[위아래|위위아래]]--를 벽으로 마감하였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하였고, [[문]] 위는 풍형 홍살을 꾸며놓았다. * [[단청]]은, 창방은 모로단청[* 부재 끝부분에만 문양을 넣고 가운데는 긋기로 마무리한 단청이다.]을 입혔으나 주심도리 부분은 긋기단청[* 가칠단청 위에 선만을 그어 마무리한 단청으로, 가칠단청은 무늬없이 단색으로만 칠한 단청이다.]으로 칠하였다. ||<table width=662>[[파일:서궐도 자정전.png|width=100%]]|| ||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에서 묘사한 자정문과 자정전 || * [[조선]] 후기에 들어 [[경희궁 자정전|자정전]]을 혼전[* 魂殿. [[임금]]이나 [[왕비]]의 [[국장]] 뒤 3년 동안 신위(神位)를 모시던 전각.] / 빈전[* 殯殿. [[국상]] 때, [[상여]]가 나갈 때까지 [[임금]]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전각.]으로 주로 사용하였으며 이에 맞추어 자정문과 자정전 사이에 혼전 / 빈전에 설치하는 [[복도|복도각]]을 설치하였다. 여기서 복도각은 [[혼령]]이 드나드는 [[길]]이란 의미이다.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 자정문, 자정전을 철거할 때 같이 헐었다. [[1990년대]] 말 이 일대를 [[복원]]하였지만, 복도각은 복원하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른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희궁 자정전, version=31)] [[분류:경희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