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일: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4.png|width=420]] || [[파일: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5.jpg|width=420]] ||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347|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 석조약사불좌상]] [목차] == 개요 == 8세기 ~ 9세기 경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경주)|남산]]의 삼릉계곡에서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 석조 불상. [[대한민국의 보물|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된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의 형제 불상으로 유명하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내용 == [[파일: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1.jpg]] [[파일: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2.jpg]] [[파일: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3.jpg]] [[https://www.facebook.com/gyeongju.knp/videos/경주-남산-삼릉계-석조약사여래좌상-경주국립공원/766456333820425/|사진 출처 : 경주국립공원 공식 페이스북 :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 불상 높이 3m 40cm. 경주 삼릉계곡에서 만들어진 8세기~9세기 경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 불상으로, 원래는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 삼릉계곡 정상부 바위 아래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반출되었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나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등 수많은 경주 시내의 유물들이 일제의 치적쌓기 경쟁의 일환으로 [[서울]]이나 [[일본]] 등으로 강제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불상도 같은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이 석불은 [[광배]]와 대좌가 온전히 남아있는 보기드문 불상이다. [[항마촉지인]]의 [[약사여래]]좌상으로 얼굴은 근엄하게 명상에 잠겨있는 모습인데, [[머리]]에는 넙적한 육계를 새기고 전체에 나발을 조각하였으며 원만하고 근엄한 상호의 [[눈썹]]은 이중 반원으로 조각하였다. 미간에는 백호를 조각하였고 머리의 앞뒤가 길며, [[신라]] 특유의 삼도가 새겨진 목은 짧게 조각하였다. 가사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로 비스듬히 내린 우견편단에, 왼쪽어깨에서 부터 무릎까지 별도로 덮어 변형된 통견형식을 취하고 있다. 왼손은 배 앞에서 오른 발 위에 얹고 약합을 얹었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에 얹어 촉지인을 하고 있다. 얼굴이 풍만하고, 신체는 건장하며, 층단형으로 표현된 옷주름 등이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양식을 이어받은 모습이다. [[광배]]는 거의 원형으로 두광과 신광 모두 이중선으로 돌리고, 바깥으로 단순한 불꽃모양을 조각하였다. 두광의 안쪽에는 자방을 만들고 주변으로 [[연꽃]] 8엽을 조각하였고, 선과 선 사이에는 화불 3구와 구슬장식 십자모양 문양을 조각하였다. 신광은 이중선 사이에 연 한 줄기가 올라와 꽃망울과 연잎과 활짝핀 연꽃 한 송이를 조각하였다. 두광과 연결되는 부분에 올라온 활짝 핀 연꽃에는 화불을 새겨넣었다. 대좌는 상중하대를 갖춘 팔각형으로 통일신라시대 대좌의 일반형이다. 지대석에 붙은 하대에는 복판의 복련을 16잎 조각하고, 중대석은 팔각으로 처리하였는데 앞뒷면에는 안상 안에 [[향로]]를, 나머지 면에는 공양천인상을 조각하였다. 상대석에는 겹연화문을 조각하여 통일신라 중엽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의 생기없는 굳은 얼굴, 뭉툭한 손, 짧고 웅크린 자세 등 최전성기를 지난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광배와 대좌는 매우 정교하며 장식적이다. 전체적으로 광배와 대좌의 비례가 안정감이 있어 800년을 전후한 시기의 불상으로 여겨진다. 이 불상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에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신라의 대표 불상으로 차출된 후 100여년에 지난 오늘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파일: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7.jpg]] [[파일: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6.jpg]]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6327|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 발견 당시 불상은 [[절벽]]과 큰 바위 사이에 다진 자그마한 터 위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불상이 있었던 주변 바위에는 지름 30㎝ 가량의 반원형 기둥 자리가 남아 있고 [[기와]]편이 흩어져 있어 신라시대 당시에는 큰 건물 안에 모셔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약사여래]]불은 3미터 40센티미터가 넘는 큰 크기를 하고 있는데 당시 [[신라]]인들은 불상을 큼직큼직하게 위용있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특이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755년([[경덕왕]] 14)에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內末)이란 장인이 [[분황사]]에 무게 30만 6천 7백근(斤)의 약사불동상(藥師佛銅像)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존하는 [[성덕대왕신종]]이 구리 12만근을 들여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거기에 비하여 이 약사불의 크기는 애교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 불상의 수배가 넘는 크기일 것으로 짐작되는 분황사 약사불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파일: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8.jpg]] 사진 출처 : 경주 분황사의 약사불상 이야기 - 한국상장회사협의회 경주 [[남산(경주)|남산]]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시대 절터는 147개 가량 되며, 특히 이 불상이 있었던 삼릉곡에는 가장 많은 수의 불상이 봉안되었다. 이 [[약사여래]]상은 [[대한민국의 보물|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된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지금으로부터 1,200~1,300여년 전 [[신라]]인들의 불교문화 및 석조공예술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된다. [[분류:신라의 공예]][[분류: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