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1.jpg]] [[https://sajinga.tistory.com/1294|사진 출처]] [목차] == 개요 == 慶州 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 [[통일신라]] 초기, 8세기 전반 경에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경주)|동천동]]에 위치한 굴불사(掘佛寺)에서 조성한 [[화강암|화강석제]] 마애사면불상 8구. 현재 굴불사[* [[경상북도]] [[경주시]] [[산업로(울산)|산업로]] 4214-76, 불굴암 ([[동천동(경주)|동천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보물|대한민국 보물]]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 내용 == [[파일: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3.jpg]] 8세기 경에 조성된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 마애불상으로, 높이 약 3.5m 정도의 커다란 바위 사면에 각각의 불상들을 조각해놓은 것이다. 서쪽 면은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아미타삼존불]], 동쪽 면은 유리광세계의 [[약사여래]], 남쪽 면은 양각의 [[석가여래]]입상과 음각의 입불상 2구, 북쪽 면도 역시 [[미륵보살]] 입불상 2구를 양각으로 새겨놓았는데 이렇게 동서남북 4면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은 사방정토(四方淨土)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러한 불상군을 사방불(四方佛)이라 부른다. 먼저 서면에 조각된 불상의 경우 왼쪽의 보살입상은 [[머리]] 부분이 파손되었지만, 오른쪽의 보살입상의 보관에서 화불(化佛)이 확인되고 있어 중앙의 본존이 서방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아미타]]불이고 그 옆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불로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앙 본존의 높이는 약 3.51m 정도 되는 대형 거불이다. 남면의 삼존상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불상의 훼손이 심한데 이 파손된 이유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문화재 [[도굴]]꾼들이 떼어갔다는 얘기가 있고, 두번째로는 그보다 앞선 [[조선]]시대 때 유학자들에 의하여 파손된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 다만 조선 유학자들이 파손했다면 바로 옆에 있는 다른 불상들을 가만히 놔뒀을 이유가 없으므로 일본인들이 떼어갔다는 주장이 좀 더 현실성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아미타 본존불은 [[한국]] 내에서 [[바위]]에 몸체를 새기고 머릿돌을 따로 만들어 얹은 최초의 사례인데, 이런 양식은 이후 [[경주시]] [[남산(경주)|남산]] 약수곡 마애불이나 경주시 이천동 마애불 등에 영향을 주었다. [[파일: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2.jpg]] 남면에 있는 [[석가여래]]상 역시 원래는 서면의 [[아미타불|아미타삼존불]]처럼 총 3구가 모여 삼존불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협시불 1구가 완전히 소실되어 사라져버린 관계로 지금은 단 2구만이 남아있다. 파괴한 주체에 대하여 아직 논란이 있는 서면과는 달리 이 남면의 삼존불은 [[일본인]]들이 파괴한 것이 확실한데, [[일제강점기]] 당시 굴불사를 찾은 [[일본인]]들이 남면의 오른쪽 보살을 완전히 떼어가고 가운데 본존상의 머리마저 부숴서 떼어내 가져갔다는 기록이 남아 전하고 있다. 북면의 [[미륵]]상과 마찬가지로 굴곡진 신체의 맵시 있는 처리, 얇은 옷무늬의 흐르는 듯한 묘사로 인해 우수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파일: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4.jpg]] 동면에 있는 [[약사여래]]상은 결가부좌(結跏趺坐) 자세를 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약그릇을 상징하는 보주를 들고 있다. 또한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수인은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의 사방불 동면과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광배 뒷면 상에서도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러나 8세기 중반 이후 [[한국]]에서 조성된 대부분의 약사불상들은 대부분 왼손에 약합을 들고 오른손을 무릎위로 올리고 있어서 시무외인을 결한 이러한 형식의 약사불상은 그보다 이른 초기 형식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북면에는 2구의 보살상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선각(線刻)으로 표현된 십일면의 얼굴과 여섯 개의 손이 달린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을 하고 있는 [[관음보살]]이고 나머지 하나는 [[미륵보살]]이다. 여섯 개의 손을 가진 관음보살의 경우 그중 두 개는 양어깨 위로 올리고, 두 개는 가슴 앞에 모으며, 두 개는 양옆으로 내린 상태이다. [[파일: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5.jpg]]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이차돈]] 순교 사찰인 [[백률사]]에 오르던 중 땅에서 염불소리가 나 파보니 사면석불이 나왔고, 이후 절을 지어 굴불사(掘佛寺)라 이름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 사면불상이 바로 그것이다. 8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진 [[신라]]의 석조사면마애불로,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 전하는 자료라 [[한국]] 고대 사면불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서면에 있는 아미타삼존상은 8세기 후반 [[일본]]에서 제작된 [[나라현]](奈良縣)의 도쇼다이사(唐招提寺)의 목조불상과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고대 신라의 석조기술 및 불교문화가 일본으로 전래된 과정에 대해서도 연구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면석불의 북쪽 면에 조각된 십일면육비의 관음보살상은 이미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밀교]]적 성격을 띠는 불상이 조성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매우 귀중한 예이다. 이에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 바깥고리 ==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25602&cid=46659&categoryId=46659|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67908&cid=40942&categoryId=37713|두산백과 :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 [[https://ko.wikipedia.org/wiki/경주_굴불사지_석조사면불상|한국어 위키백과 :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54905&cid=42840&categoryId=42846|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 굴불사지 석불상]]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29827&cid=42856&categoryId=42856|대한민국 구석구석 :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 보물 제121호 ==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2,01210000,37&pageNo=1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慶州 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 >경상북도 경주 굴불사터에 있는 이 불상은 바위의 서쪽에는 아미타여래불, 동쪽에는 약사여래불, 북쪽에는 미륵불, 남쪽에는 석가모니불을 각각 새긴 사방불(四方佛) 형태이다. > >『삼국유사』 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땅을 파 보니 이 바위가 나와서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 기록만으로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이때쯤 불상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서쪽의 아미타여래는 신체만 돌기둥에 조각했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머리가 얼굴보다 크게 표현되어 꼭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인다. 신체는 당당하고 굴곡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손과 발 또한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좌우에는 다른 돌로 보살입상을 세워 놓아서 3존불의 모습을 띠고 있다. 동쪽의 약사여래는 양 발을 무릎위로 올리고 앉아 있는데 몸 전체가 앞으로 숙여져 있다. 얼굴 표현은 매우 세련되었으며, 신체는 활기차고 긴장감이 넘쳐 보인다. 북쪽면의 오른쪽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보살입상이 서 있고, 왼쪽에는 6개의 손이 달려있는 관음보살을 얕은 선으로 새겼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둥글고 예쁜 얼굴, 굴곡있는 우아한 자세 등 그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남쪽면은 원래 3존상으로 되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오른쪽 보살을 완전히 떼어 가고 가운데 본존상의 머리마저 떼어갔다고 한다. 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을 표현한 것인데, 굴곡이 진 신체의 모습과 얇은 옷주름의 묘사가 매우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고 있다. > >이처럼 입체의 표현, 음각과 양각의 표현, 좌상과 입상의 표현 등을 변화있게 배치한 점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풍만하고 부드러우면서 생기를 잃지 않은 솜씨를 볼 때 통일신라 초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분류:대한민국의 보물]] [[분류:신라의 공예]] [[분류: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