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제국 황실)] ||<-3><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29176e><tablebgcolor=#29176e> {{{#ffd800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br] {{{+1 '''景恩君[br]경은군'''}}}}}} || ||<width=20%> '''{{{#ffd800 군호}}}''' ||<-2><bgcolor=#fff>경은군(景恩君) || || '''{{{#ffd800 이름}}}''' ||<-2><bgcolor=#fff>이재성(李載星) || || '''{{{#ffd800 출생}}}''' ||<-2><bgcolor=#fff>[[1860년]] [[11월 10일]] || || '''{{{#ffd800 사망}}}''' ||<-2><bgcolor=#fff>[[미상]] || [목차] [clearfix] == 소개 == [[조선]]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 [[사도세자]]의 3남인 [[은언군]]의 증손자이며 [[상계군]]의 양손자이자[* 친할아버지는 상계군의 동생 [[풍계군]].] [[익평군 이희|익평군]]의 [[서자]]이다. == 생애 == 1860년([[철종(조선)|철종]] 11년) 11월 10일, [[익평군 이희|익평군]]와 그의 [[첩|소실]][* [[성씨]]와 [[이름]]은 알 수 없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4세(만 2세) 때인 1863년(철종 14년) 9월에 아버지 익평군을 잃었다. 실제 핏줄로만 보면 그가 익평군의 가계(家係)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서자]]인데다 당시 아주 어렸기 때문에 [[덕흥대원군]]의 12대손인 [[덕안군 이재덕|이덕주]][* 이재성과는 생가로 22촌 형제 뻘이다.]가 익평군의 적장자로 입적해서 [[가문]]을 이었다. 익평군 사후 경은군은 [[영평군 이경응]]과 함께 '''[[효종(조선)|효종]]의 [[혈통]]을 물려받은 단 둘뿐인 왕족'''이었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다 [[덕흥대원군]], [[선조(조선)|선조]], [[인조]] 대에서 갈라진 사람들이 입양 온 것이었다.'''][* [[효종(조선)|효종]]의 아들 [[현종(조선)|현종]]은 독자, 현종의 아들 [[숙종(조선)|숙종]]도 독자였다. 숙종의 장성한 세 아들 중 [[경종(조선)|경종]]과 [[연령군]]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고, [[영조]]만 아들 둘을 남겼다. [[영조]]의 장자였던 [[효장세자]]는 9살에 [[요절]]했고, 차남 [[사도세자]]가 5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장남 [[의소세자]]도 3살에 죽었고, 차남 [[정조(조선)|정조]]가 슬하에 2남을 두었으나 정조의 대는 [[헌종(조선)|헌종]]을 끝으로 결국 다 끊기고 말았다. 4남 [[은신군]]과 5남 [[은전군]]은 아예 자녀가 없었고, 유일하게 사도세자의 3남 [[은언군]]만이 슬하에 무려 8남을 두었다. 그런데 그중 6명은 아들이 없었고, [[풍계군]]과 [[전계대원군]]만 아들을 낳았다. 전계대원군은 3남([[회평군]], [[영평군(1828)|영평군]], [[철종(조선)|철종]])을 두었는데, 이 3명 다 아들을 못 낳았거나, 낳았어도 일찍 죽었고 둘째 영평군만이 [[철종(조선)|철종]] 사후에도 생존했다. 풍계군은 독자 [[익평군]]을 낳았고, 익평군도 (서자이지만) 독자 경은군을 두었다. 그러다 보니 [[철종(조선)|철종]] 사후 [[효종(조선)|효종]]의 생물학적 남계 후손이 '''영평군과 경은군 둘뿐이었던 것이다.'''] 익평군 사후 몇 달 지나지 않은 1864년 1월에 [[철종(조선)|철종]] 역시 [[죽음|승하]]했는데, '''핏줄과 [[항렬]]을 두루 따졌을 때 차기 왕위에 그가 가장 가까웠다.'''[* 철종과 가장 가까운 핏줄은 당연히 형제인 영평군이었다. 그러나 영평군은 철종의 동생이 아니고 형이었던 데다 고질병이 있어서 철종의 뒤를 이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만 3세라는 너무 어린 나이, 서출의 한계[* 애당초 서자라 본가의 계통도 잇지 못했으니(...).], 그리고 [[흥선군]]과 [[신정왕후 조씨]]의 커넥션 등 여러 문제로 왕이 되지 못했다. === 관직 생활 ===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20살 때인 1879년([[고종(대한제국)|고종]] 16년) 9월 승문원[* [[조선시대]]에 [[외교]] 문서를 맡은 관청.] 이문학관에 임명받았다. 그가 맡은 벼슬은 주로 [[왕실]] 관련 직책이었다. 국상 때마다[*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1890년)와 [[명성황후]](1895년), [[효정왕후]](1904년), [[순명효황후]](1904년).] 종척집사[* [[조선시대]] [[국상]] 때 가까운 [[왕실]]의 [[친척|종친 및 인척]]에게 시키는 임시 벼슬.]를 지냈고, 종정원 주사[* 宗正院. 종정원은 [[조선]] 말기 [[왕실]] 계보에 관한 업무를 맡아 보던 관청이다.]를 역임했으며, 《선원보략》[* 왕실 족보.]을 수정할 때 그것을 관리감독했다. 또한 향관(享官)[* [[국가]]에서 실시하는 각 [[왕릉]], 선원전 등의 [[제사]]를 맡아보는 관리.]과 사직서령[* 社稷署令, [[사직단]]과 그 주변의 청소을 관리하던 사직서(社稷署)의 벼슬이다.]을 역임했고, 시종원 시어[* 侍從院. 1895년 관제 개혁 때 왕실 사무를 관장하는 궁내부 아래에 새로 소속 된 관청. 시어(侍御)는 [[군주|왕]]을 곁에서 보좌하는 직책을 말한다.], 전선사 주사[* 典膳司.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 [[궁전|궁중]] 내의 [[식사]] 공급 업무를 맡았던 관청.], 비서원승[* 秘書院. 비서원은 조선 말기에 [[어명|왕명]]의 출납과 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비서원승(秘書院丞)은 최고 책임자인 비서원경 바로 아랫 서열.] 등 임금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직책을 맡았다. 1897년([[광무]] 원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후, [[왕족|종실]]과 여러 [[신하|대신]]들과 함께 고종에게 [[칭제건원]]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같은 해부터 [[독립협회]]에 [[종친]] 자격으로 [[기부|찬조금을 후원]]했다. [[대한제국]] 수립 직후에는 [[이천]]군수, [[원구단]] 황궁우 역소 별감, 내부 시찰관 등을 지냈다. 후원해주던 [[독립협회]]가 해산당한 후에는 [[담배]] 제조 공장인 연초제조주식회사(煙草製造株式會社)를 세워서 경영했다. 1899년([[광무]] 3년) 말에 [[고조#s-2|고조할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종대왕을 거쳐 장조의황제로 [[추존]]받았다. 이에 [[황제]]의 4대손은 [[왕족|황족]]으로 대우한다는 예법에 따라 경은도정(景恩都正) 작호를 받았고 1900년([[광무]] 4년) 경은군(景恩君)으로 승격했다. 경은군으로 승격할 무렵, [[덕수궁|경운궁]](덕수궁) 담장 확장 공사를 마무리한 [[공적]]으로 종2품으로 [[품계]]가 올라갔다.[* [[덕수궁|경운궁]]은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이후 몇 년 간 계속 확장 공사를 했다.] 같은 해 2월 13일 [[회양군]] [[공립]] [[보통학교|소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록에도 없다.] 해고당하고 경은군 [[작위]] 또한 박탈당했다가 1902년(광무 6년)에 [[사면]]받았다. 1903년(광무 7년) 8월에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궁내부는 [[조선]] 말기 [[왕실]] 내부의 여러 업무를 총괄하던 관청으로, 특진관은 16명 이하의 인원으로 구성된 관리직이다.][* 칙임관(勅任官) 4등.]으로 임명받으면서 다시 경은군(景恩君)으로 봉해졌다. 1906년([[광무]] 10년) 7월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대한제국 훈장#s-3.4|훈 1등 태극장]]을 하사받았다. [[순종(대한제국)|순종]] 즉위 후, 1907년([[융희]] 원년) 10월 14일에는 항일 [[의병]]과 내통하였다는 혐의로 벼슬자리에서 쫓겨났다.[* 이틀 뒤인 1907년 10월 16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기사]] 원문이다. "직명을 거두다 - 경은군 리ᄌᆡ셩씨ᄂᆞᆫ 죵젹이 슈상ᄒᆞ고 의병으로 간셥ᄒᆞ였다ᄒᆞ여 그 직텹을 위션 거두어 드리라고 죠칙이 ᄂᆞ리셧더라(현대 한국어: 경은군 이재성씨는 종적이 수상하고 의병으로 간섭했다하여 그 직첩을 우선 거두어 들이라고 조칙을 내리셨더라)"][* 이 때 순종이 내린 명은 "경은군(景恩君) 이재성(李載星)이 남몰래 행동하면서 나쁜 무리와 호응한다고 하니, 직명(職名)을 우선 환수하도록 하라."였다. 이 소식은 [[황성신문]]에서 10월 18일자 제1면 1단으로 보도했다.] == 말년 == 1910년([[융희]] 4년) 3월에 [[행방불명]]되었다. 같은 달 23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거처를 알지 못해 경시청에서 그 종적을 찾는다는 말이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 원문이다. "가ᄂᆞᆫᄃᆡ가 어디여 - 경은군 리ᄌᆡ셩씨ᄂᆞᆫ 근일에 무ᄉᆞᆷ ᄉᆞ건을 인ᄒᆞᆷ인지 거쳐를 알지못ᄒᆞᆫ다ᄂᆞᆫᄃᆡ 경시쳥에서 그죵젹을 형탐ᄒᆞᆫ다는 말이 잇다더라(현대 한국어: 가는데가 어디여 - 경은군 이재성씨는 요새 무슨 사건 때문인지 거처를 알지 못한다는데 경시청에서 그 종적을 샅샅이 찾는다는 말이 있다더라)"] 이 후의 행적은 확인할 수 없다. 언제 죽었는지,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첫번째 부인 [[안동 권씨]]의 묘가 [[서울]] [[왕십리]]에 있었으나 그마저도 위치를 잊고 말았다. == 여담 == * 1898년([[광무]] 2년) [[이천]] [[군수]]로 재직할 당시, [[경기도]] 관찰부에 납부해야 할 3000원을 [[도둑]]맞았다.(...) 그 때문에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김영덕이 이천의 [[세금]]을 면제해줄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 이천군수로 재직 시, [[백성]]들 삶의 현장에 직접 뛰어 들어 그들의 고충을 잘 듣고 이해해주었다고 한다. * 승문원 이문학관으로 일할 때, 항상 [[제복|관복]]을 똑바로 차려입고 정시 출근하도록 했으나 탈이 있다고 하여 얼마 못가 교체당했다고 한다. 또한 황족으로써 [[독립협회]]에 후원한 것과 [[의병]]들과 어울린 점을 통틀어 보면, 그의 성격은 아마 기존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건 하는 성격이었으며, 불의를 보면 못 참고 정의롭게 살고자 했던 스타일로 보인다. 이런 면은 조카 뻘인 [[의친왕]]과 비슷하다. === 가족과 후손 === [[부인]]이 둘 있었다. 첫 부인은 한 살 연상의 [[안동 권씨]]로 1888년 4월에 사망했고 두 번째 부인은 19살 연하(...)의 여흥 이씨로 사망 년월일은 알 수 없다. 슬하에 2남을 두었다. 권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장남 이춘용(李䡅鎔)을, 이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 이우용(李萭鎔)을 두었다. 이 외의 경은군의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철종(조선)|철종]] 사후 생존해있던 [[효종(조선)|효종]]의 생물학적 남계 후손은 [[영평군(1828)|영평군]]과 경은군 단 둘뿐이었다. 영평군은 친아들을 낳지 못했으므로[* 단, 양자를 들여 법적인 후손들은 있다.], 만약 경은군 이재성의 두 아들이 대를 잇지 못했다면 [[효종(조선)|효종]]의 실제 남계 자손은 현재 완전히 사라진 셈이 된다. [[분류:대한제국의 황족]][[분류:서출]][[분류:전주 이씨 은언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