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후궁(중종 ~ 고종))] ||<-3><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C23352><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23352 0%, #C23352 20%, #C23352 80%, #C23352)" '''{{{#ffd400 조선 헌종의 후궁[br]{{{+1 경빈 김씨 | 慶嬪 金氏}}}}}}'''}}} || ||<bgcolor=#C23352> '''{{{#gold 궁호}}}''' ||<-2>[[순화궁|순화궁]](順和宮) || ||<bgcolor=#C23352> '''{{{#gold 빈호}}}''' ||<-2>경빈(慶嬪) || ||<|2><bgcolor=#C23352> '''{{{#gold 출생}}}''' ||<-2>[[1832년]]^^([[순조]] 32년)^^ [[8월 27일]] || ||<-2>장소 불명 || ||<|2><bgcolor=#C23352> '''{{{#gold 사망}}}''' ||<-2>[[1903년]]^^([[광무]] 11년)^^ [[4월 21일]] || ||<-2>[[조선]] [[한성부]] [[순화궁]] || ||<bgcolor=#C23352> '''[[본관|{{{#gold 본관}}}]]''' ||<-2>[[광산 김씨|광산(光山)]] || ||<width=50><bgcolor=#C23352> '''{{{#gold 부모}}}''' ||<-2>부친 김재청 모친 평산신씨 || ||<bgcolor=#C23352> '''{{{#gold 부군}}}''' ||<-2>[[조선]] [[헌종(조선)|헌종]] || ||<bgcolor=#C23352> '''{{{#gold 자녀}}}''' ||<-2>자녀없음 || ||<width=50><bgcolor=#C23352> '''{{{#gold 묘소}}}''' ||<-2>[include(틀:지도, 장소=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너비=100%)] ----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후궁묘역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헌종(조선)|헌종]]의 후궁. [[궁호]]는 순화궁(順和宮)이다. 궁호가 있다는 데서 짐작이 가겠지만 [[원빈 홍씨]], [[화빈 윤씨]], [[수빈 박씨]]의 뒤를 이어서 역사상 마지막으로 무품 빈이다.[* 조선 역사에서 마지막 무품 후궁은 [[순헌황귀비 엄씨]]다.] [[광산 김씨]]이며, 아버지는 주부 김재청(金在淸), 어머니는 평산 신씨, 외할아버지는 신명하(申命河)이다. == 생애 == [[헌종(조선)|헌종]]의 첫 [[왕비]]인 [[효현왕후]]가 16세에 죽자, 새로운 [[왕비]]를 뽑기 위한 [[간택]]을 시작했다. 이때 김씨도 참여했는데, [[헌종(조선)|헌종]]은 김씨를 좋아했으나 왕실 어른들은 [[효정왕후|홍씨]]가 더 마음에 들었다. 당시 국혼은 당사자보다 왕실 어른들의 뜻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었기에, 결국 홍씨가 계비([[효정왕후]])로 정해졌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 일화는 야사가 확실한 것이, 당시의 승정원일기를 보면 초간택에 김재청의 딸은 보이지 않는다. 간택을 위한 처녀 단자에 이름이 없었으니 첫눈에 반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로맨스 소설]] 급. >대왕대비전이 조석형에게 전교하기를, 전 정랑 홍재룡(洪在龍)의 딸, 동몽교관(童蒙敎官) 윤규석(尹奎錫)의 딸, 부사과 신태운(申泰運)의 딸, 유학 서기순(徐麒淳)의 딸, 행 부호군 김공현(金公鉉)의 딸, 선공감 봉사 정기승(鄭基承)의 딸, 생원 박흥수(朴興壽)의 딸을 모두 재간택(再揀擇)을 들이고, 그 나머지는 허혼(許婚) 하라. > >---- >《승정원일기》 헌종 10년 4월 22일 실제로는 [[효정왕후]]가 새 왕비가 된 지 3년 후인 1847년(헌종 13)에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의 명으로, 후궁 간택을 하게 된다. 이 때 김씨가 [[헌종(조선)|헌종]]의 [[후궁]]으로 최종 낙점, 경빈으로 책봉되었다.[* 헌종실록 14권, 헌종 13년 10월 20일 병인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xa_11310020_001|#]] ] 헌종은 경빈 김씨를 총애했고, 그녀를 위해 [[창덕궁]]에 [[창덕궁 낙선재|낙선재(樂善齋)]]와 석복헌(錫福軒)을 지었다고 한다. 이는 [[정조(조선)|정조]]와 [[수빈 박씨]]의 처소를 서로 곁에 두어 순조를 둔 것을 따라한 것으로, 경빈 김씨가 후사를 낳기를 바란 뜻이다. 아마도 이 시기의 김씨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김씨는 궁궐을 떠나야 했다. 약 2년 간의 짧은 신혼을 누린 셈. 김씨는 궁궐을 떠나서 [[순화궁]]에서 살게 되었으나 왕실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예우를 받는다. 경빈 김씨는 시할머니 [[순원왕후]]와 시어머니 [[신정왕후 조씨]]를 잘 모시고, 헌종의 왕비인 [[효정왕후]]에게도 예를 갖추며 조용히 살다가 1907년(광무 11) 향년 75세로 사망했다. [[고종황제]]는 그녀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조문(弔文)을 직접 지었다. 본인은 조용히 살았지만 사실 그녀의 노년기는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심지어 [[대한제국]] 선포와 [[을사조약]]까지 근대 조선의 굵직굵직한 사건과 망국의 서막이 함께 열리고 있었다. 사망 한 달 후에는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경빈 김씨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서삼릉]]에 안장되어 있다. == 관련 문서 == * [[국기복색소선 및 사절복색자장요람]] * [[정미가례시일기]] [[분류:조선의 후궁]][[분류:광산 김씨]][[분류:대한제국의 인물]][[분류:1832년 출생]][[분류:1907년 사망]][[분류:헌종(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