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당(통일왕조)|당나라]]의 건국 이후 [[한국사]]의 [[삼국]], 그 중에서 특히 [[신라]], 그리고 [[일본사]]에서는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에 [[당(통일왕조)|당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파견한 사신단이다. == 한국의 견당사 == 당이 건국된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은 꾸준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당 건국 이후 곧 수십년간의 [[삼국통일전쟁]]이 벌어지고 그 결과로 신라가 남아 당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견당사가 파견되었기에 일반적으로 한국사에서 견당사라고 하면 신라의 견당사를 의미한다. 신라는 정기적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지만, [[나당전쟁]]의 후유증으로 [[신문왕]]~[[효소왕]] 때는 거의 [[단교]]에 가까울 정도로 교류가 줄어들었다.[* 당나라에 사신 보낸 횟수를 세어보면 무열왕 때 6회, 문무왕 때 14회, 신문왕 때 1회, 효소왕 때 1회, 성덕왕부터 46회로 다시 늘어났다.] [[성덕왕]] 때부터 다시 사신을 보내기 시작해, 당나라의 주변국 중 가장 당나라와 교류가 많은 나라로 손꼽혔다. == 일본의 견당사 == ,,けんとうし,, 遣唐使 [[파일:external/www.bell.jp/0510-05.jpg]] 복원된 견당사선 [[파일:external/tv01.search.naver.net/Kentoshi_vessel.jpg]] 견당사선 모형 === 역사 === ==== 견당사의 전신 견수사 ==== 6세기 후반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여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구축하자 일본은 그런 중국을 보며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일환으로 [[견수사]]를 꾸려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당시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는 [[백제]]의 영향을 받아 국가적으로 [[불교]] 문화를 장려함과 동시에 일본의 정치, 문화, 종교 등 다방면에서 급속적인 성장을 이루웠는데 그러한 드라이브는 바로 견수사였다. 견수사는 중국의 율령 제도인 [[3성 6부제]], 선거제([[과거제]]의 전신) 그리고 학문과 기술 등을 받아들여 [[아스카 시대|아스카 문화]]를 꽃피웠다. 그동안 일본은 중계지인 한반도를 거쳐서 중국 문물을 수용할 수 있었지만 견수사로 더 이상 한반도에 의존하지 않고 중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 견당사의 역사 ==== 당나라와 일본이 처음 접촉한 것은 631년으로 일본의 당나라 입조 이후 일본은 당나라에 16차례 이상 사신을 파견했다. 견당사로 파견된 일본인은 [[당태종]]의 [[정관지치]]를 보면서 이를 일본 사회에 전파하여 일본이 중앙집권화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겐메이 천황]]이 수도를 [[헤이조쿄]]로 옮기면서 당나라의 [[시안(도시)|장안]]성을 모방해 축조한 것도 바로 견당사의 영향이었다. 견당사는 단순히 사신만 파견하는 것이 아니라 당학을 익히기 위한 견당유학생이나 승려 등도 함께 당에 입조하였다. 대표적으로 [[헤이안 시대]]의 [[승려]] [[엔닌]](円仁), [[천태종]] 창시자 [[사이쵸]](最澄), [[진언종]]의 창시자 [[구카이]](空海) 등이 있었다. 견당사는 주로 중국의 설날 행사 참석에 맞추기 위해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일본을 출발했다. 신라와 사이가 좋을 때는 한반도 [[전라도]] 해안을 돌아서 [[산동반도]]로 항해하는 루트를 주로 이용했지만 헤이안 시대 신라와 사이가 나빠지면서 나가사키 쪽에서 [[동중국해]]를 횡단하는 원양항해를 많이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중간쯤에 있는 [[제주도]] 해적에게 일본 견당사가 털려서, 신라 정부와 협의해 돌려받는 사건도 있었다.] 가끔 사신단이 [[발해]] 땅을 통과해서 [[동해]]로 항해하는 루트로 중국에 갔다오기도 했다. 그러나 9세기 중엽 당나라가 쇠퇴하면서 일본 내에서도 수당의 율령체제가 붕괴되고 있었다. 이에 좌경대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는 견당대사에 부임되었음에도 당의 망국을 근거로 견당사 폐지를 건의해 894년 견당사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이후 [[송나라]]가 [[오대십국]]의 혼란을 끝내고 중국을 다시 통일하지만 이미 일본 내에서는 국풍 문화가 급진하여 한자를 간소화시켜 [[가나 문자]]를 만들게 되어 일정 부분 일본의 정체성을 확립하였고 더 이상 중국이나 고려와 직접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 그 밖에 ==== 일본은 견당사를 파견한 것을 당나라와의 조공-책봉의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당에 입조를 하였고 이후 여러차례 사신을 보냈기 때문에 형식적으론 조공-책봉의 성격을 띠었다. 하지만 당나라도 일본을 번국이 아니라 먼 듣보잡 섬나라로 취급하였다. 당나라로 가는 해로는 크게는 두가지로 나뉘는데 초기 견당사는 주로 북로(신라로)를 이용하다가 한반도의 정세 변화로 702년에 [[동중국해]]로 가로지르는 남로를 개척하여 이후 남로를 이용했다. 그런데 남로는 한반도를 피해서 남해바다 외해를 직통하는만큼 폭풍우가 몰아치는 등 잦은 기상 여건의 악화로 배가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간에 제주도에 표류해서 신라 경주에 사신을 보내 살아남은 사람을 데려온 적도 있다. 그래서 기상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남도로라는 추가 해로를 개척해 이용하였다. 그리고 딱 한 차례에 발해로를 이용했는데 [[동해]]로 북상하여 동경용원부와 [[상경용천부]]를 경유한 뒤 유주로 입경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때는 759년으로 당나라는 [[안사의 난]]으로 화북 지방이 전란으로 뒤덮여 있었다. ~~흠좀무~~ 견당사는 2척에서 4척으로 편성되었고, 한 회에는 500명이 승선하기도 했으나 평상시에는 100명 내지는 130명까지 승선했다. 속일본기 기록을 보면 당시 일본은 견당사뿐 아니라 견신라사, 견발해사 등 주변 다른 국가로 보내는 사신단도 운영했고, 심지어 [[보덕국]]에 보내는 견고려사, [[탐라국]]에 보내는 견탐라사도 보낸 적이 있다. 견신라사 같은 경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지도에 반해서 실제론 의외로 상당히 활발하게 교류했는데,[* 다른 시대의 비슷한 것인 [[조선통신사]]와 비교하면, 견신라사가 횟수에서 넘사벽으로 잦고 활발했다.] 다만 현대의 역사고육에서는 여러 이유로 견당사만을 부각시키고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는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 당나라로 견당사를 보내는 바닷길 중간쯤에 탐라국이 있다보니, 견당사를 탐라인들이 약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분류:조공·책봉 사절]] [[분류:일본의 역사]] [[분류: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