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홋카이도]][[분류:일본의 역사]][[분류:일본의 건축물]]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243f7d><tablebgcolor=#ffffff,#191919><width=50%><:>[[파일:Kaitakushi.jpg|width=100%]]||<width=50%><:>[[파일:do6.jpg|width=100%]]|| ||<:>개척사 본청사(1873년)||<:>현재 [[홋카이도 개척촌]]에 복원되어 있는 개척사 본청사. || '''{{{+4 [ruby(開, ruby=かい)][ruby(拓, ruby=たく)][ruby(使, ruby=し)]}}}''' [목차] == 개요 == [[홋카이도]] 등의 [[일본]] 북쪽 영토의 개척을 위해, 1869년([[메이지]] 2년) 7월 8일에서 1882년(메이지 15년) 2월 8일까지 있던 일본의 관청이다. 개척사 설치 이전의 행정은 하코다테부(箱館府)[* 개척사로 통합되기 이전에 잠깐 하코다테현(箱館県)이 되었다.]가 관할했고, 1882년에 홋카이도 개척사가 폐지되어 관할 구역이 삿포로현, 네무로현, 하코다테현으로 분할되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500><tablebordercolor=#243f7d><tablebgcolor=#ffffff,#191919><width=50%><:>[[파일:Kaitakushi_flag.png|width=100%]]||<width=50%><:>[[파일:홋카이도 기.png|width=100%]]|| || 당시 [[개척사]]기[* (북진기; 北辰旗) [[북극성]] 모양. [[삿포로 맥주]]의 로고에도 쓰인다.] || 현재 쓰이는 [[홋카이도]]기 || == 상세 == ||<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006400>[[파일:Akarenga_douchou.jpg|width=100%]]|| || 현재의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 || [[홋카이도]]는 [[메이지 시대]] 이후 계획적으로 개척되었다. 에조치(蝦夷地)를 [[홋카이도]]로 개칭하고 홋카이도 개척사(開拓使)를 설치한 것이 1869년의 일이다. 1870년에는 개척사 가설(仮)청사가 준공되었고, 1873년에는 '''개척사 본청사'''를 지었으나, 1879년에 불에 타서 소실되었다. 현재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 바로 위에 十자로 되어있는 곳이 개척사 본청사가 있던 자리이다. 개척사 본청은 현재 [[홋카이도 개척촌]]에 복원되어 있다. 메이지 일본 정부는 홋카이도 개척사(開拓使) 차관으로 [[구로다 기요타카]][* 후일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일본 제2대 총리]]]를 임명했는데, 그는 홋카이도의 식산흥업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1871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는 에도시대 말기부터 시작된 [[러시아 제국|러시아]]의 남진 정책에 자극 받아, 어떻게든 홋카이도를 개척하기 위해 해외 기술자의 도움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농무국의 국장을 맡고 있던 호레이스 케프론과 지질 광산학자였던 T.안티셀 등이 [[일본]]을 방문하여 홋카이도를 3년 정도 머물며, 개척의 방법에 대해서는 [[가축]]과 [[기계]]를 이용한 밭농사와 축산업이 적당하다고 제안했다. 이에 구로다 기요타카는 [[미국]]식 시스템으로 홋카이도를 개척하기로 결정하고, 벼농사를 중심으로 했던 이주자들에게 새로운 축사 및 농업을 가르치기 위해 에드윈 던,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와 W. M 휠러, W. P 브룩스 등을 홋카이도로 초청했다. 한편으로, 1872년 부터는 [[도쿄]]에 개척사 가설학교(開拓使仮学校)를 설치하여 홋카이도를 본격적으로 개척할 학생을 모집하였다. 국비 학생 50명, 사비 학생 5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학교 졸업 후 국비는 10년, 사비는 5년 간 의무적으로 홋카이도의 개척에 종사해야 했었다. 1875년에는 이 학교가 [[삿포로]]로 이동하여 삿포로학교가 발족되었고, 1876년에는 '''일본 최초'''로 [[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기관인 '''[[삿포로농학교]]'''(現 [[홋카이도대학]])가 설립되게 된다. ||<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23651C><:>[[파일:Hokudai-agricultural.jpg|width=100%]]|| || [[삿포로농학교]]의 [[삿포로시 시계탑]] || 미국에서 초청된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는 1876년 7월에 [[삿포로농학교]] 초대 교두(敎頭)로 임명되었고, 그의 지도에 의해 개교와 거의 동시에 [[개척사]] 관할의 임야에 농원을 개설하고 [[미국]]식 축사의 도입을 지시하여, 광대한 농장을 열고 홋카이도의 이주자를 위한 현대적인 대규모 농업을 채용하는 거점을 만들었다.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의 구상은 그의 제자인 W. P 브룩스 등에게 인계되어 홋카이도 개척에 적합한 작물과 농기구의 수입과 선정, 재배 및 관리 방법의 지도를 실시하였고, 홋카이도 농법 구축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이렇게 당시 홋카이도 개척의 최전선 역할을 한 [[삿포로농학교]]는 후에 [[제국대학]]으로 승격하여 현재의 [[홋카이도대학]]의 전신이 되었다. 한편으로, 1882년에 홋카이도 개척사가 폐지되어 관할 구역이 [[삿포로현]], [[네무로]]현, [[하코다테]]현으로 분할되었다. 1886년에는 다시 현을 폐지하고 '''[[홋카이도]]'''라는 하나의 행정적 도(道)로 묶어서 출범했으며, 1888년에 붉은 벽돌로 만든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홋카이도청 본청사]]가 개척사 본청사 터 남측에 신설되며 홋카이도 전체를 통괄하는 기관이 탄생했다. == 기타 개척사 == === 가라후토 개척사 === 기존 개척사를 본따 [[가라후토]]에 세워진 개척사. 1870년 2월 13일 부터 1871년 8월 7일까지 존재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둘을 헷갈리지 않게 원래 개척사를 '''홋카이도 개척사''' 라고 칭하기도 한다. === 동남제도 개척사 === [[조선]]에도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라는 보직이 있었다. 1883년(고종 20) 조선 정부가 울릉도를 비롯해 동해안에 있는 섬들을 보호·개발하기 위하여 신설한 관직. [[조선]] 정부는 자국 영토에 정당한 주권을 행사하고 주변국과의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울릉도]]와 인근 섬, 일본에서 원산에 이르는 해도의 방어와 개척을 추진하여 1883년 3월 16일 동남제도개척사를 신설하고, 울릉도를 비롯해 동해 일대에 산재해 있는 섬들의 개척과 [[고래잡이|포경]](捕鯨) 사업을 관장하게 하였다. 동남제도개척사 설치는 위 [[홋카이도 개척사]]를 참작한 것으로, 조선 정부가 이 제도를 참고한 것은 만국공법(萬國公法) 체제 아래 조선의 영토와 영해권을 확실하게 다지고, 외세의 이권 침탈로부터 물산을 보호하여 경제적 이익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 기타 == ||<tablealign=center><tablewidth=500><tablebordercolor=#243f7d><tablebgcolor=#ffffff><width=30%><:>[[파일:tkt 포로 맥주.png|width=100%]]||<width=50%><:>[[파일:Kaitakushi_flag.png|width=100%]]|| || {{{#black 삿포로 맥주 상표}}} || {{{#black 홋카이도 [[개척사]]기}}} || [[삿포로(맥주)]] 회사는 개척사에서 세웠고 [[삿포로 맥주]]의 상표도 이 홋카이도 개척사 문양에서 따왔다. 1876년 당시 개척사의 차관이었던 [[구로다 기요타카]]의 지휘로 세워진 '''일본 최초의 맥주회사'''로, [[홋카이도]] [[삿포로시]]에 개척사맥주양조소(開拓使麦酒醸造所)를 설립하여 다음 해에 냉제맥주를 제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