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弘立 1560 ~ 1627 [목차] == 생애 초반 == [[조선]]의 [[문신(동음이의어)|문신]]. 본관은 [[진주 강씨|진주]](晋州), 자는 군신(君信), 호는 내촌(耐村). 본디 문관의 가문이였으며 강홍립은 [[임진왜란]] 기간 중인 1597년 과거에 급제했다. 이후 [[선조(조선)|선조]] 치세 말기 동안 [[함경도]] 일대의 군비를 감독하고 시찰하는 등 군사 부문을 포함한 이런저런 관직을 거치며 [[광해군]]의 눈에 들어왔다. 1605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명나라로부터 허락받는데 성공하여 광해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 와중에 선조가 사망했다. == 강홍립 밀지설에 대하여 == 《[[승정원일기]]》와 《청태종실록》 등을 따라서 광해군이 [[사르후 전투]]에 조선군을 파병하면서 사전 투항 지시가 있었다는 해석이 일찍이 제기되었고, 최근에는 반대급부로 밀지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기도 하나, 전쟁 상황을 관망하고, 출병의 이유가 상국의 독촉에 따른 것임을 전달하라는 이중외교가 있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한성주(2018), 《조선시대 藩胡 연구》, p. 334~337;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광해군은 칙서의 도착으로 출병이 명확해지자, 명군이 패전할 경우를 대비하여, 조선군이 명 장수의 지휘를 받지 않도록 하여 도원수 강홍립의 지휘권을 지키는 한편, 조선군을 명의 동로군에 예속시켜 자의에 따른 출병이 아님을 드러내고자 했다. 또한 동로군이 출병하기 직전에도 후금과의 초피 교역을 시행하고 녹봉을 지급했으며, 이 과정에서 회령부사 한명련으로 하여금 누르하치의 차관 쇼롱오(šolonggo)에게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보냈지만 명군의 진[唐陣]의 뒤에 있을 것"이라 유시하였다. 한명련과 같이 광해군의 밀령을 받은 강홍립은 배동관령에 이르러 호역 하세국을 허투 아라(hetu ala)로 보내어 조선 측이 후금을 적대시하지 않으며, 이번 출병은 상국(명)의 재촉을 받아 부득이하게 한 것으로, 얼마안되는 군졸들은 명군 진 뒤에 있었다고 전했다. 마찬가지로 [[사르후 전투]] 현장에서는 조선군 좌우영이 전멸하자, 다이샨은 조선군 중영에 통사를 요구했고, 이에 강홍립은 통사 황연해로 하여금 "지금은 부득이 해서 온 것"이라 전했으며, 후금 측도 과거 조선의 번호들을 보내어 조선의 뜻을 이해하고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삼사에서는 강홍립 등을 적신(賊臣)이라 칭하면서 처벌을 주장했으나 이들에게 밀지를 내린 광해군은 그들의 처벌 논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p. 184~196.] == [[인조반정]] 이후 == 사르후 전투에서의 투항 이후, 후금에서 지내던 강홍립은 변발을 거부하고 한족 여성과 결혼을 했다.[* 다만 이때 강홍립은 결혼하여 조선에 아내와 자식 6명이 있었던터라 이 한족 여성은 첩이었다. 이 여성은 강홍립이 조선으로 갈때 따라가서 그의 집에 같이 살다가 강홍립 사후 청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후금의 2대 황제가 된 [[홍타이지]]는 조선을 침공하려 했고 후금의 1차 조선 침공, 즉 [[정묘호란]]에서 조선인이었던 강홍립은 길잡이를 강요받아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가는 것을 도왔다.[* 당시 강홍립은 원정군에 차출된 후 봉황성에 이르러서야 조선의 정벌길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루 평균 진군거리가 100km가 넘는 후금군의 경이적인 쾌속진격.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주선으로 강홍립은 조선에 다시 귀환하게 된다. 신료들은 적에게 항복했다는 사유로 강홍립을 참수하라 했으나, ~~항복해야만 하는 사정을 알았기에~~ 인조의 의지로 강홍립은 삭탈관직 당하는 선에서 끝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강홍립은 병으로 사망했다. 사후 복권되는 듯 했으나, 사대주의파들의 반대로 취소되었고, 강홍립의 후손들은 평생 숨어 살아야 했다. [[삼전도비]]에도 그의 이름이 실려있는데, 이후 [[건륭제]]의 이름(애신각라 홍력)과 발음이 같은 게 문제가 되어 비문의 이름이 강황래(姜黃來)로 개조당하기도 했다. 묘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있다. == 강홍립을 연기한 배우 == * [[조선왕조 오백년]] [[남한산성]] - [[오지명]] 이 드라마에선 강홍립을 가여운 장군으로 묘사했다. 광해군의 명으로 전쟁을 치루지않고 항복했으며 이괄의 난 때 달아난 한윤이 청으로 달아나서 강홍립에게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왕이 바뀌자 조정에서 강장군 및 부관들의 식솔을 3대 몰살시켰다고 거짓말을 하는 통에 경악한다. 부장인 김경서가 피를 토하고 분통터져하다가 분사하고 강홍립의 꿈에 나와서 왜 우리들 식솔이 억울하게 죽어야 하냐며 조선이란 나라는 이제 조국도 아니라고 하소연하며 청군을 도와 그 조선을 뭉개시오! 라고 피를 토하며 애통해하는 꿈에 괴로워한다. 결국 청군이 조선으로 쳐들어올 때 도우며 비로소 한윤이 거짓말을 한 걸 알고 조선에 남는데 그의 처형을 주장하던 대신들에게 인조가 거부하고 조선에 살게한다. 강홍립은 유배되어 있던 광해군에게 찾아가서 "전하의 생각이 맞았사옵니다. 그저 전하를 몰아내고 쓸데없이 명나라나 찾다가 결국 청에게 이렇게 시달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라며 아쉬워한다. * [[화정]] - 정해균이 맡아서 열연했다. [[분류:조선/인물]][[분류:조선군/군인]][[분류:1560년 출생]][[분류:1627년 사망]][[분류: 진주 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