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rokps.or.kr/1043.jpg|width=150]] 姜弼善 1918년 00월 00일 ~ 1990년 9월 22일 [[대한민국]]의 전 [[친일반민족행위자]], [[정치인]]이다. 1918년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현 [[아산시]] 온양동)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말기 [[만주국]] 중앙경찰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 [[일본 총무성|내무성]]이 운영하는 경찰강습소 본과를 나왔다. 이후 만주국에서 모교인 중앙경찰학교의 조[[교수]]로 근무했다. 그리고 만주국 고등관 시험 행정과에도 합격했다. [[8.15 광복]] 후에는 [[지린 성]] 창바이 현에서 한국인회의 회장을 맡아 잠시 만주에 머물다가 귀국했다. 고향인 아산군 온양읍에서 동방산업 사장, 온양극장, 온양정미소 사장을 지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충청남도 아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영진(정치인)|이영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민우(1905)|이민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제17번)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신민당에서는 충청남도지부 위원장, 지도위원 등을 지냈다. 한편 반 [[유진산]]계에 속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을 탈당하여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민주통일당 후보로 충청남도 [[천안시]]-천원군-아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종철(1920)|김종철]] 후보와 신민당 [[황명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에 복당하여 해당 선거구로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정재원에 밀렸다. 다시 신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종철 후보와 신민당 [[정재원(1942.06)|정재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가 1983년 해금되었다. 만주국 국무원 치안부 소속으로 일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해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해외 부문에 포함되었다. [[분류:제8대 국회의원]][[분류:신민당(1967년) 국회의원]][[분류:민주통일당 국회의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해외]][[분류:아산시 출신 인물]][[분류:1918년 출생]][[분류:1990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