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의병장 강춘삼 == ||<-2><table align=right><bgcolor=white><tablewidth=420><tablebordercolor=#878787>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강춘삼.jpg|width=100%]]}}} || ||<colbgcolor=#878787><colcolor=#ffffff> '''성명''' ||강춘삼(姜春三) || || '''생몰''' ||[[1858년]] [[5월 3일]] ~ [[1913년]] [[5월 6일]] (향년 55세) || || '''출생지''' ||[[황해도]] [[해주시|해주군]] 청운방 사리 마치동[* 구한 말, 해주군 청운면 사리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해주군 청룡면 용매리 → 1938년, 벽성군 청룡면 용매리 → 1945년, 경기도 연백군 청룡면 용매리 → 1950년, 황해도 남연백군 청룡면 용매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황해남도 청단군 영산리.][br](현 [[황해남도]] [[청단군]] 영산리)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clearfix] 황해도 해주 출신 의병장. 1894년 동학당에 입당해 보부상 접주로 종사했으며, [[동학 농민 혁명]]이 실패로 끝난 후에는 숨어지내다가 1907년 [[정미 7조약]]으로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목천 부사 [[박정빈(독립운동가)|박정빈]]의 의병에 가담했다. 그는 박기섭 의진의 중대장인 [[심노술]]이 거느린 의병들과 더불어 평산군 서쪽부터 해주군 사이에 걸쳐서 일본군과 교전해 상당한 전과를 거뒀다. 그러다가 1909년 일제가 [[남한 대토벌 작전]]을 감행했을 때 대다수 의병대가 소멸되었지만, 그 만은 끝까지 일본군에 대적해 1910년 해주 근처 여묵 원야(餘默 原野)에서 일본군을 습격해 타격을 입혔고 그해 가을 해주 동촌 청단시 쟈라기 벌판에서 적군과 교전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13년 5월 일본 헌병대에게 급습을 받고 체포된 뒤 천단시 학곡(學谷)에서 총살되었다. 향년 55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대한민군 정부는 1990년 강춘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분류:해주시 출신 인물]] == [[3.1 운동]] 시위 참가자 강춘삼 == ||<table align=right><tablewidth=420><tablebordercolor=#878787><colbgcolor=#878787><colcolor=#ffffff> '''성명''' ||강춘삼(姜春三) || || '''생몰''' ||[[1886년]] [[12월 10일]] ~ [[1968년]] [[8월 2일]] (향년 81세) || || '''출생지'''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마중리 || || '''추서''' ||대통령 표창 || [clearfix] 충청남도 서산군(현 당진시) 출신 독립운동가.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1919년 4월 초, 충남 서산군 대호지면 면장 이인정(李寅正)과 면직원 이대하(李大夏), [[송재만]] 등이 주동하여 발생한 4월 4일 대호지면 앞 광장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월 24일 서산 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대를 맞는 형벌을 받았다.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968년 8월 2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에 강춘삼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동명이인/ㄱ]][[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