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건국훈장 대한민국장)] ||||<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47a0><tablewidth=450><tablebgcolor=#0047a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강우규}}}[br]姜宇奎'''}}}}}} || ||||<#fff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강우규.jpg|width=100%]]}}} || ||<|2><width=25%> {{{#FFFFFF '''출생'''}}} ||<#ffffff>[[1855년]] [[4월 20일]] || ||<#ffffff><(> [[평안남도|평안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 [[진주 강씨]] 인헌공파 집성촌이다.] || ||<|2> {{{#FFFFFF '''사망'''}}} ||<#ffffff>[[1920년]] [[11월 29일]] (향년 65세) || ||<#ffffff><(>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서대문형무소]][br](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 {{{#FFFFFF '''국적'''}}} ||<#ffffff><(>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일제강점기 조선]] || || {{{#FFFFFF '''본관'''}}} ||<#ffffff><(> [[진주 강씨|금천 강씨]](衿川 姜氏)[* 진주 강씨 인헌공파라고도 한다. 조상인 [[강감찬]]이 탄생한 [[낙성대]]가 금천([[시흥군|시흥]])에 속했기에 강감찬의 후손만을 금천 강씨라고도 한다.] || || {{{#FFFFFF '''별칭'''}}} ||<#ffffff><(> 자(字)는 찬구(燦九), 호(號)는 왈우(曰愚) || || {{{#FFFFFF '''직업'''}}} ||<#ffffff><(> 한의사 → 독립운동가 || || {{{#FFFFFF '''가족'''}}} ||<#ffffff><(> 강중근(아들) 강영재(손녀) || || {{{#FFFFFF '''종교'''}}} ||<#ffffff><(> [[유교]]([[성리학]])→[[개신교]](장로회) || || {{{#FFFFFF '''의거'''}}} ||<#ffffff><(> [[사이토 마코토]] 암살 미수 사건 || >'''"단두대상에 홀로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목차] [clearfix] == 개요 == [youtube(oTdfMidCJ6M)]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한의사]]. 본관은 [[진주시|진주]], 호는 왈우(曰愚).[* 간혹 일우(日愚)라고 표기되어 있는 곳도 있으나 왈우가 맞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855년 7월 14일(음력 6월 1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친누나 집에서 성장하였고 친형에게 한학과 [[한의학]]을 익혀 생활의 방편으로 삼았지만 전통적 학문으로는 개항 이후 점증하는 사회의 [[근대화]] 요구를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점차 개화 사상으로 기울어졌고 [[개신교]] [[장로회]]에도 입교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집안 어른들과의 갈등도 생겨 1883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주하였으며 홍원 읍내 남문 앞 중심지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이를 기반으로 읍내에 사립 [[학교]]와 [[교회]]를 세워 신학문을 전파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등 [[계몽]] 운동을 전개한다.[* 이는 "우리 집에서도 몇 차례 이동휘 선생을 모셨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는 손녀의 기억에도 드러나듯이 당시 [[평안도|관서]]와 [[함경도|관북]] 지방민들의 존경을 받던 이동휘의 영향이 컸다.] 1910년 8월 강우규는 [[경술국치]]로 인해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한다. 1911년 봄 북[[간도]] 화룡현 두도구로 [[망명]]하였고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순방하면서 [[박은식]], [[이동휘]], [[계봉우]] 등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도를 모색하여 갔다. 1915년 우수리강 대안의 [[지린성]] 요하현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북만주에 위치한 이 곳은 남만주와 연해주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강우규는 이 곳에 한인 [[동포]]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신흥동(新興洞)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이 곳에서 [[한민족]]을 새롭게 발흥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돈을 많이 모은 강우규는 광동 학교를 세워 [[청소년]]의 민족 의식을 고취하려 노력하였고 군자금 조달에 주력하기 위해 박은식이 조직한 '노인동맹단'에 가입한다. 1919년 전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나고 강우규 역시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갖지만 [[세계]] 열강으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승인받지 못하고 1919년 5월을 넘기며 점차 소강 상태에 빠져들자 위기감을 느낀 강우규는 당시 일제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식민 [[정책]]을 변경하고자 조선 총독을 교체하는 것을 보고 새로 임명될 제3대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러시아]] 군인으로부터 [[영국]]에서 제조하였다는 수입 [[폭탄]]을 구입한 다음에 몰래 휴대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으로 오는 선편에서 폭탄을 기저귀처럼 다리 사이에 차고 들어왔다고 한다.] 입국한다. 당시 [[일본]]은 입출국하는 사람들을 검문했지만 강우규는 60세가 넘는 [[노인]]이었기에 검문을 받지 않고 입국할 수 있었다. 8월 초부터 [[서울]] [[안국동]] [[김종호]]의 집에 머무르면서 신임 총독의 부임 정보를 탐문하던 강우규는 [[신문]] 보도를 통해 8월 12일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신임 총독에 임명되어 9월 2일 부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신문에 난 사이토 마코토의 [[사진]]을 오려 가지고 다니면서 그의 [[얼굴]]을 익혔다고 한다. 사이토 마코토 부임 전인 8월 28일부터 남대문역[* 현재의 [[서울역]]. 서울역의 이름은 [[경부선]] 철도가 개통될 때인 1900년 남대문역으로 출발하여 1923년 경성역이 되었다가 1947년 서울역으로 변경되어 지금에 이른다.] 부근의 여인숙으로 거처를 옮겨 매일같이 역전에 나아가 지형지물을 면밀히 답사하면서 투탄 위치를 탐색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거사를 준비하였다. 거사일인 9월 2일 [[남대문]] 밖 [[중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한 강우규는 남대문역에서 미리 보아둔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오후 5시 부임식을 마치고 관저로 떠나는 사이토 마코토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다. 그러나 폭탄이 빗나가 뒷차를 맞히면서 일본인 취재 [[기자]] 2명을 포함한 3명이 사망하고 정무총감인 [[미즈노 렌타로]], [[뉴욕]]시장의 딸이었던 해리슨 부인, 만주 철도 이사장인 [[쿠보]], [[호위]] 군경, [[조선총독부]] 관리 등 37명에 중경상을 입혔다. 정작 사이토 마코토는 두꺼운 해군복의 혁대 덕분에[* 일본 해군복의 혁대는 다른 [[군복]]과 달리 두꺼운 편이라 웬만한 물체도 뚫기 어려웠다.] 파편 몇 조각이 혁대에 박혔을뿐 부상을 입지 않았다.[* 훗날 사이토 마코토는 조선총독 재임 후 1932년 일본 총리대신 자리에 오르지만 1936년 [[2.26 사건]]으로 [[파시스트]] 청년 장교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일본 [[경찰]]들은 강우규를 체포했다가 '설마 노인이...'라는 생각에 풀어줬다고 한다. 혼비백산하는 군중들 사이로 빠져나온 강우규는 안국동의 김종호, [[사직동(서울)|사직동]]의 [[임승화]], [[가회동]]의 [[장익규]] 집으로 옮겨다니면서 다시금 의거를 계획하지만 9월 17일 목격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장익규의 집에서 [[친일]] 경찰 [[김태석]]에 의해 체포된다. 1920년 2월 25일 강우규는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사형]]을 언도받은 이후 자신의 폭탄에 휩쓸린 취재 기자들에 대해 폭탄의 위력을 몰랐다고 항변한 그는 [[아들]]에게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라는 말을 남기고서 1920년 11월 29일 66세를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다. 강우규는 사형 집행 당시 감상이 어떠하냐는 일제 검사의 물음에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라는 시를 남긴다. == 기타 == [[박경리]]의 소설 [[토지(소설)|토지]] 2부에서 등장한다. [[의료]] 활동을 했던 행적을 따라서 '강 의원'이라고 등장하며 토사곽란에 시달리는 주갑이를 치료해주고 주갑이는 강우규를 따라서 만주의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작중 유일한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광복]] 이후 [[남한]]에 정착한 가족으로 장남 강중근, 손녀 강영재가 생존해 있었으나 1985년 12월 강영재가 후사없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현재 남아있는 [[후손]]은 없다. [[파일:statue.png|width=400height=600]] 2011년 9월 구(舊) 서울역 광장에 강우규 의사 [[동상]]이 건립되었다. 이 때문에 강우규 의사가 구 서울역사를 배경으로 의거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실제로 강우규 의사의 의거 당시인 1919년 구 서울역사는 건평 15평 수준의 조악한 목재 가건물이었고 구 서울역사는 의거 이후인 1922년 착공되어 1925년 준공된 [[건물]]이다. 이외에도 그가 독립운동 활동을 했던 것을 기리기 위해 활동지였던 서울역 인근의 서울역[[버스]]환승센터(02-007) 정류소 명칭을 '서울역버스환승센터.강우규 의거 터'로 병기한다.[[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935743&s_no=935743&page=8|참고]] == 관련 자료 == *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59333905|강우규의사 평전 - 잊혀진 의열투쟁의 전설]], 박환, 선인, 2010 *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85134277|강우규 평전 - 항일 의열 투쟁의 서막을 연 한의사(1)]], 은예린, 책미래, 2015 [[분류:1855년 출생]][[분류:1920년 사망]][[분류:교수형된 인물]][[분류:일제강점기의 인물]][[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덕천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장로회 신자]][[분류:금천 강씨]][[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