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의 국보 31~60호)] [[파일:external/www.cha.go.kr/1612075.jpg]] ||<-2><tablealign=right><tablewidth=360><tablebgcolor=#315288><tablebordercolor=#315288><bgcolor=#fff>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국보|{{{#f39100 대한민국 국보 제51호}}}]]''' || ||<-2> {{{#fff {{{+1 '''강릉 임영관 삼문'''}}}[br]{{{-1 江陵 臨瀛館 三門}}}}}}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강원도 강릉시 임영로131번길 6 (용강동), 너비=100%, 높이=100%)]}}}|| ||<width=80> '''{{{#fff 소재지}}}''' ||<bgcolor=#fff> [[강원도]] [[강릉시]] 임영로131번길 6 (용강동) || || '''{{{#fff 분류}}}''' ||<bgcolor=#fff>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관아 || || '''{{{#fff 수량/면적}}}''' ||<bgcolor=#fff> 1동 || || '''{{{#fff 지정연도}}}''' ||<bgcolor=#fff> 1962년 12월 20일 || || '''{{{#fff 제작시기}}}''' ||<bgcolor=#fff> [[고려시대]] 후기 || [목차] == 개요 == [[고려]] [[태조(고려)|태조]] 丙申年(936년)에 창건된 강릉부 '''[[객사]]'''[* 객사(客舍)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인 임영관의 정문이다.[* 하지만, 이 당시에 객사문이 지어졌는가? 라는 것은 확정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미술사 및 역사 전공자에게는 '''강릉 객사문'''으로 알려져 있다. '임영'은 강릉의 옛 별칭이다.[* [[조선]] [[세종(조선)|세종]]의 적 4남인 [[임영대군]]의 군호가 여기서 유래됐다.] 강릉 임영관 삼문은 1962년 [[대한민국의 국보|국보]] 제51호로 지정되었다. == 내용 == 고려시대부터 있었다는 기록 때문에, [[수덕사#s-3.1|수덕사 대웅전]], [[부석사#s-2.2|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s-2.1|봉정사 극락전]], [[은해사#s-2.1|은해사 거조암 영산전]]과 함께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건축물이다. 특히 앞에 명시한 건축물들이 전부 [[불교]] 건물인 것에 비해, 고려시대 건축양식이 일부 남아있는 국가기관의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강릉시에서는 강릉 대도호부[* 명칭에 관해서 이견이 있으나, 통칭 강릉 관아를 말하는 것이다.] 터에 있던, 강릉시청, 강릉경찰서, 우체국 지점 등을 순차적으로 이전하면서 객사문 일대를 역사공원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강릉시는 객사문의 활용 방안을 다양하게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객사문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둥 초석은 자연석 덤벙주초이다. 외부 기둥인 외진주는 [[배흘림기둥|배흘림 원주]]며, 내부 기둥인 내진주는 민흘림 각주로 되어 있다. 또한 무고주 5량 구조이며, 내부 연등천정이다. 공포는 주심포계 익공[* 공포에 날개를 다는 듯한 익공양식은 조선초에 시작되었다고 본다.]인데,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 완전 개보수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 기타 == 임영관이 강릉부 객사로써 창건된 것이 936년이기 때문에, 이 문 역시 936년에 지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파일:gaksa.jpg]] 그러나 [[공민왕]]이 1366년 병오(丙午)년에 친필로 임영관의 판액을 하사했다는 기록 때문에, 고려 후기에 지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존재하며, 건축 양식으로 볼 때, 고려말~조선초에 객사문이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후 기록에는 '''객사'''의 중수 및 개조에 대한 기록이 남겨져 있을 뿐, '''객사문''' 별도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1627년, 임영관 대청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기록을 토대로 이 시기에 객사문도 개조 및 보수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제시대에는 강릉 관아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일제의 건축물들이 자리잡는다. 임영관 터에는 강릉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섰으며, 객사문은 그 와중에 철거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해방 후 학교 터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왔고, 이 과정에서 1959년 번와보수공사를 시작으로 4차례의 보수를 했다. 그 중 2000년 객사문 해체보수공사는 객사문의 지붕 모양을 바꾸는 큰 공사 였다. 원래 지붕의 마감 부분이 와구토[* [[석회]], [[화강암]], 정적토의 혼합]로 덮어져 있었는데 이를 막새기와로 바꾸었다. 이 때문에 고증에 맞는 공사를 한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드는 상황이다. 현재에도 그 자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강릉시가 강릉 내 행사[* 단오제, 커피축제 등]를 관아에서 치루고 있으므로, 많은 관광객들이 국보 안을 통과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 바깥고리 == * [[https://ko.wikipedia.org/wiki/강릉_임영관_삼문|한국어 위키백과 : 강릉 임영관 삼문]]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5329&cid=46656&categoryId=466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강릉 임영관 삼문]]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573788&cid=51890&categoryId=53723|향토문화전자대전 : 강릉 임영관 삼문]]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56970&cid=40942&categoryId=33382|두산백과 : 강릉 임영관 삼문]] == 국보 제51호 ==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1,00510000,32&pageNo=5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 강릉 임영관 삼문 (江陵 臨瀛館 三門)]]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 문만 남아 있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이란 현판은 공민왕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학교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교가 헐린 뒤 1967년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서게 되고 현재는 마당에 객사문만 남아 있다. 남산의 오성정·금산의 월화정·경포의 방해정은 객사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다. > >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앞면 3칸에는 커다란 널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 형태이다. >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세부건축 재료에서 보이는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분류:대한민국의 국보]][[분류:강릉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