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관련 문서, top1=고려양)] {{{+1 蒙古風}}} [목차] == 개요 == 원 간섭기 시절 때 [[고려]]에 유행했던 [[원나라]]([[몽골]])의 풍속을 말하는 것으로, [[고려양]]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 설명 == 몽골의 문화가 고려에 퍼져나간 경로는 다양하지만 가장 주요한 경로는 당시 몽골에 빌붙어 권세를 누린 친원파와 몽골 황실에서 성장했던 [[왕자]]들[* 이 왕자들을 한자로 질자(質子)라고 부르며 [[몽골어]]로는 툴루게(禿魯花)라 부른다.], 몽골 황실에서 고려 왕에게 시집온 몽골 공주들[* [[제국대장공주]], [[계국대장공주]],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 [[덕녕공주]], [[노국대장공주]] 등.]을 통해 들어온 것이 많다. 대표적인 것들을 찾자면 먼저 식생활에서는 [[알코올]]을 증류해서 빚는 [[소주]], [[소]]의 뼈를 물에 삶아 파를 넣고 끓인 [[설렁탕]], [[우유]]에 쌀가루를 곱게 갈아서 만든 [[타락죽]]과 [[순대]] 등을 들 수 있다.[* [[순대]]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다. 순대가 몽골풍이라는 견해는 몽골의 전투식량 중에 게데스라는 음식에서 유래했다는 견해다. 게데스는 양의 피에 메밀가루, 야생 마늘, 부추를 넣고 소금을 섞어 간을 해 돼지 창자에 담아 솥에서 찐 음식이다. 다만 순대라는 이름은 [[몽골어]]가 아닌 [[만주어]]의 성이두하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몽골식 [[버터]]인 수유(酥油)도 몽골풍 중 하나다. 의생활에서는 남자들이 [[변발]][* 이것이 변형되어 조선시대 상투의 특징인 백호치기가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을 하는 것이 있고 여자들의 경우에는 예장에 쓰는 [[족두리]]와 신부가 머리 장식으로 쓰는 [[산호]] 구슬 꾸러미의 도투락 댕기 등이 몽골풍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국어도 [[몽골어]]와 [[원나라]]시대 중국어의 영향을 받았는데, 왕실에서 왕자, 공주들이 국왕과 왕후를 각각 아바마마, 어마마마라 부를 때의 경칭 '마마(媽媽)'도 이에서 유래한 것이며 임금님의 밥상을 [[수라]]라고 부르는 것, 장사치나 벼슬아치 등과 같이 어미에 -치(赤)를 붙이는 것도 이 때부터다.[* 이 어미에 -치를 붙이는 몽골어 방식은 당시 고려시대의 인명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1363년에 역적 [[김용(고려)|김용]]이 흥왕사에서 [[공민왕]] 암살을 시도했을 때 공민왕을 대피시키고 대신 죽음을 맞은 환관이 '안도치'라는 인물인데 한자로는 '安都赤'라고 쓴다. 여기서 赤은 몽골 단어 '치'의 음차이므로, 한국식 한자음인 안도적이 아니라 안도치로 읽는 것이 옳다. ][* 하필이면 赤이 '적' 음가도 아닌 '치' 음가를 옮기는데 쓰인 것이 의아할 수 있는데, 이 당시 북방 중국어는 이미 근고한어로 이행하며 입성(入聲) 운미의 약화에 따라 赤의 발음이 /t͡sʰiʔ/ 로 변했기에 그리 된 것이다. 실제로 파스파문자로 한자의 발음이 표기된 원대의 운서 '몽고자운'에서도 赤은 齒, 恥 등과 함께 't͡sʰi'로 분류되어있다.] 당시 몽골은 몽골인 제일주의에 입각해 각 민족들을 4개의 계층으로 나누고 그에 맞게 대우를 했는데 1등은 당연히 [[몽골인]]이었고 2등은 [[색목인]], 3등은 [[여진족]]과 [[거란족]] 그리고 옛 [[금나라]] 치하의 북중국 [[한족]]으로 이뤄진 한인, 4등은 옛 [[남송]] 치하의 남중국 [[한족]]으로 이루어진 남인이었다. 당시 원나라의 인구에서 몽골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1.5%에 불과했기에 부족한 숫자를 커버하고자 색목인들을 많이 등용했다. 그 때문에 당시 고려로 시집 온 몽골 [[공주]]들을 따라 색목인 관리들도 고려로 많이 넘어왔다. 이 색목인들은 [[아랍인]], [[위구르족]], [[탕구트족]] 등을 말하는데 주로 위구르족들이 많았다. [[위구르족]]들도 몽골을 따라 고려로 넘어오면서 위구르족의 문화도 많이 전파되었다. 이 위구르족들을 고려에서는 '''회회인(回回人)'''이라고 불렀다. [[고려가요]] [[쌍화점]]에 나오는 그 회회 아비는 바로 위구르족 남성을 말하는 것이며 쌍화라는 것은 위구르식 [[군만두]]인 삼사를 말하는 것이다.[* 빵 안에 양고기로 만든 소를 넣고 구운 음식으로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일대에서 많이 먹는 음식이다.] 쌍화 즉, 삼사 외에도 고려에 귀순한 위구르족의 후손인 송도 설 씨가 만든 데서 유래했다는 설적(薛炙)이란 음식은 쇠고기나 소의 내장을 꼬챙이에 꿰어 구운 음식으로, [[터키]]에서 주로 먹는 [[케밥]]이나 [[동남아시아]]에서 먹는 사떼와 매우 유사한 음식이다. 고려에 거주하는 위구르족들은 [[위구르어]]를 쓰고[* 당시 몽골에서는 편지를 쓸 때 위구르 문자로 편지를 쓰는 일이 많았고 또 위구르족 출신 관료들도 고려 조정 내에 많았기 때문에 고려 후기~조선 초까지 [[역관]]들이 배우는 필수 [[외국어]] 과목 중 하나에 위구르어가 있었다.]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며 개경에 예궁(禮宮)이라 부르는 이슬람 사원을 짓고 자신들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유지하며 살았다고 한다. 또 예궁에서 예배를 거행하고 이맘의 인도 하에 이슬람의 예배 의식인 대조회송축을 조정에서 거행하기도 했다고도 한다. 즉, 우리의 예상과 달리 이슬람교가 [[기독교]]보다 한반도에 더 먼저 전파되었던 셈이다.[* 하지만 당시 [[고려]]는 [[불교]]가 국교였기에 고려 민중들에게까지는 [[이슬람교]]를 전파하지 못 했고 어디까지나 고려에서 거주하는 [[위구르족]]들에게만 국한하고 있었다는 걸 유념해야 한다. 우리나라 민중들에게까지 전파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는 여전히 기독교(정확히는 [[가톨릭]])가 최초다.] 그런데 [[공민왕]] 때 들어 몽골에게 빌붙어 권세를 누린 친원파들을 숙청하면서 반원정책을 실시하여 몽골풍을 금지했고, 아울러 조선시대로 들면 조선에서 거주하는 위구르족들이 자신들의 풍속을 고수하며 이질적으로 생활한다는 점 때문에 조선인들과 융합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위구르족들을 거의 강제적으로 조선 사회로 동화시켜 버리면서 몽골풍과 함께 들어왔던 위구르족의 풍속들도 역사 속으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분류:고려]][[분류: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