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조선 국왕)]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bf14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명종 관련 틀'''}}}}}} || ||<bgcolor=#ffffff,#1f2023>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진승총(기타 사서 포함))] }}} || ||<-3><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bf1400><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조선 제13대 국왕[br]{{{+1 명종 | 明宗}}}'''}}}}}}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명종 강릉.jpg|width=100%]][br]{{{-2 명종 강릉}}}}}} || ||<-3><bgcolor=#f5f5f5,#2d2f34> {{{#bf1400,#ff5340 '''명종공헌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br]{{{-2 明宗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 || ||<-2><color=#ffd400><colbgcolor=#bf1400> '''[[묘호|{{{#ffd400 묘호}}}]]''' ||'''[[명종]](明宗)''' || ||<|2><width=35><color=#ffd400> '''[[시호|{{{#ffd400 시호}}}]]''' ||<width=50><bgcolor=#c00d45> '''{{{#f0ad73 조선}}}''' ||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br](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 || ||<bgcolor=#f0c420> '''{{{#800000 명}}}''' ||공헌(恭憲) || ||<-2><|2><color=#ffd400> '''출생''' ||[[1534년]] [[7월 3일]] {{{-2 (음력 5월 22일)}}} || ||[[조선]] [[한성부]] [[경복궁]] || ||<-2><|2><color=#ffd400> '''즉위''' ||[[1545년]] [[8월 12일]] {{{-2 (음력 7월 6일)}}} 미시 ||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 ||<-2><|2><color=#ffd400> '''사망''' ||[[1567년]] [[8월 2일]] {{{-2 (음력 6월 28일)}}} 축시[br]{{{-2 (33년 30일 / 1만 2,083일)}}} || ||[[조선]] [[한성부]] [[경복궁]] 양심당 || ||<-2><color=#ffd400> '''[[능묘|{{{#ffd400 능묘}}}]]''' ||[[강릉(조선 명종)|강릉]](康陵) || ||<-2><|2><color=#ffd400><rowbgcolor=#bf1400> '''재위''' || '''{{{#ffd400 조선 국왕}}}''' || || [[1545년]] [[8월 12일]] ~ [[1567년]] [[8월 2일]][br]{{{-2 (음력 1545년 7월 6일 ~ 1567년 6월 28일)[br](21년 11개월 20일 / 8,025일)}}} || ||<-3><bgcolor=#ffffff,#1f2023>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tablewidth=100%><tablebgcolor=#bf1400><width=85><colcolor=#ffd400> '''[[본관|{{{#ffd400 본관}}}]]''' ||<colbgcolor=#fff,#1f2023>[[전주 이씨|전주]](全州) || || '''[[휘|{{{#ffd400 휘}}}]]''' ||환(峘) || || '''[[군호|{{{#ffd400 군호}}}]]''' ||경원대군(慶源大君) || || '''[[혼전|{{{#ffd400 전호}}}]]''' ||모의전(慕義殿) || || '''부모''' ||부왕 [[중종(조선)|중종]], 모후 [[문정왕후]] || || '''부인''' ||[[인순왕후]]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제13대 [[국왕]]. [[묘호]]는 '''[[명종]]'''(明宗), [[시호]]는 '''공헌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이고, 휘는 이환(李峘). 자는 대양(對陽)이다. [[중종(조선)|중종]]과 [[문정왕후]]의 외아들로 태어나 경원대군(慶原大君)으로 책봉되었다. 이복형 [[인종(조선)|인종]]이 중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8개월 만에 사망하면서 명종이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 생애 == === 출생과 즉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문정왕후)] [[중종(조선)|중종]]과 문정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왕이 되기 전에는 경원대군(慶源大君)[* 군호는 [[인천]]의 옛 지명인 경원군(慶源郡)에서 유래했다.]이었으며, [[인종(조선)|인종]]이 즉위할 때까지만 해도 그저 전왕인 중종의 아들이자 현왕인 인종의 [[이복형제|이복동생]]일 뿐이었으나,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급사]]함으로써 왕이 되었다. 어릴 때 양눈에 안질이 있었다는데, 인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윤임]]이 "경원대군은 안질 때문에 눈이 안 보이니 왕을 못한다"는 핑계로 그를 후계선상에서 제외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언적]] 등이 경원대군의 승계를 지지하고 문정왕후가 강력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포기하게 됐다. 따라서 생모인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대윤의 대신들과 [[사림]]들이 대거 숙청되었고 권세를 얻은 소윤(왕의 외숙부 [[윤원형]]) 일파의 [[부정부패]]는 엄청나서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 게다가 [[보우]]를 통한 [[불교]] 중흥은 유학자들의 반감을 샀다. 그야말로 [[사대부]] 입장에서는 [[외척]] + 사화 + 불교 + [[여자]]의 [[막장]] 4종 [[세트]]. 그래서 그런지 유명한 [[의적]] [[임꺽정]]의 활약도 바로 명종 재위 기간이었다. === 친정 === 20세가 되어 [[문정왕후]]가 스스로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친정이 시작된다. 야사에서는 문정왕후의 간섭이 심하였으며 심지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는 일까지 있었다고. 그리고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의 뺨까지 때렸다고 하며 명종의 행동을 [[궁녀]]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자신을 욕하는 말을 하면 곧바로 불러 야단을 쳤다고도 하는데, 그냥 야사다. 명종은 아들 [[순회세자]]의 죽음 이후로는 신하들이 없는 곳에서 성격이 괴팍해져서 [[명종실록]]에는 "명종이 [[조울증]]과 [[홧병]]을 앓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실록의 사관 논평에 나온 말이라서, 문정왕후를 비하하는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위의 기록이나 [[야사(역사)|야사]] 때문에 [[마마보이]] 임금이라고까지 비하하기도 하지만 [[정사(역사)|정사]]상으로는 근거가 없다.[* [[윤원형]], [[이기]],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허자]] 등 소윤 일파의 좌장들 중에서 윤원형과 이기를 제외한 소윤들은 "[[윤임]]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는 [[환상]]에 시달리다가 명종 즉위 3년도 못 되어 다 죽어버렸다. 유일한 생존자 허자의 경우에는 윤원형의 심복인 진복창을 [[탄핵]]했다가 윤원형의 미움을 사서 숙청당했다. 윤원형 급의 세도를 누린 이기는 존재가 윤원형에 묻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윤 [[유인숙]], [[유관]] 등을 죽인 명종 집권의 주역 중의 주역이다. 77세까지 장수하며 권세를 누렸지만 명종의 친정 전에 죽었다. 명종이 본격적으로 무엇을 하기 시작한 당시에 남은 사람은 윤원형뿐이었던 것이다. 명종은 [[이량]]을 등용해 윤원형을 견제하는 등, 윤원형의 권세를 문정왕후가 죽기 전에 많이 약화시켜 놓았다.] 실제로 [[문정왕후]]의 권한이 막강하긴 했지만,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정치에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개입한 예를 문정왕후를 까기 위해 사관들이 안 실었을 리가 없는데, 그런 기록은 없다. 명종의 정책에 문정왕후가 크게 제동을 건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중전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을 크게 중용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문정왕후는 이의를 전혀 제기하지 않았다.[* 근데 이량은 스스로 부패하여 전횡을 부리며 다른 외척들을 해치려다가, 열받은 명종에게 [[윤원형]]보다도 먼저 숙청당했다.] 그 뒤로 손꼽히는 개입이라 해봐야 명종이 [[윤원형]]을 지칭하여 "외척이 대죄를 입으면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말하자 명종을 불러 "주상, 이 어미와 외숙이 없었으면 왕이 됐을 것 같습니까?"라고 나무란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나 왕의 말이 바로 대비에게 전해졌다는 건, 그만큼 왕권이 약했다는 뜻이기는 하다.] 굳이 [[마마보이]]라고 불릴 이유가 될 만한 사건을 들자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다고 했을 때 울며불며 사양했고, "대신들은 뭐하는가! 어머니를 말리지 않고!"라며 징징댄 모습 정도. 문정왕후가 청정을 거둔다고 한 해인 1553년에 명종은 20세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저건 일상적인 수렴 거부의 쇼이고, 막상 친정을 시작한 후에는 딱히 모후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나름대로의 정치를 펼쳐 나갔다. === 치세 === 다만 재정은 어려움이 많았다. 외척의 득세도 득세이지만, 친정을 시작한 1553년, [[경복궁]]이 [[근정전]]만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이 모두 소실됐다. 게다가 1550년에는 더 이상 줄 땅이 없어 직전법을 폐지해야했다. 좋게 보면 공신, 대신들의 땅 불리기가 공적으로는 중단된 거지만, 거꾸로 말하면 이미 그러지 않아도 될만큼 부패가 극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명종은 경복궁 재건을 엄청나게 닥달함으로써, 불과 1년 만에 모두 복원해낸다. 명종은 주로 [[내시]]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문제는 명종이 [[조울증]]을 앓다 보니, 기분에 따라 총애하는 내시가 툭하면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외아들 [[순회세자]]를 일찍 잃은 이후로 더 심해졌다. 단순히 총애의 정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해서 하옥시키고 국문해서, 내시들이 "신하들에게는 [[성군]]이면서 우리들에게는 [[걸왕|걸]][[주왕|주]]나 다름 없다"고 투덜거렸을 정도라고. 1555년 70여척[* 한 배당 100명 정도 있으니, 모두 합쳐 7,000명이다.] [[왜구]]가 [[전라남도]] 서남 해안에 대규모로 침입하여 [[영암군|영암]], [[장흥군|장흥]][* 장흥 부사 한온은 전사했으나, 임시 부사인 하급 장수는 도망갔다.], [[강진군|강진]][* 광주 목사가 지휘를 했고, 병력도 꽤 많았으나, 후퇴했다. 또한, 우도 방어사인 김경석은 강진이 공격을 받는데도 지원하지 않았다.], [[진도군|진도]] 일대를 휩쓸며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는데, 이게 왜변 중 가장 규모가 큼과 동시에 마지막으로 벌어진 [[을묘왜변]]이다. 조정은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남치훈을 방어사로 임명하고 전주부윤 [[이윤경]][* 이준경의 친형이다.]을 파견하여, 진압에 어려움을 겪긴 했어도 결국 영암에서 적을 크게 파하여 그들을 몰아내었다. [[삼포왜란]] 이후 생겨난 비상기관인 [[비변사]]는 이때부터 상설 정치 기구화한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을묘왜변]] 이후 [[조선]]은 [[해군]]력을 크게 강화하게 되고, [[판옥선]]의 도입, 총통의 개량, 수군의 정비, 권관제의 도입 등의 개혁을 추진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수군의 활약을 뒷받침하게 된다. 또 줄어든 군마를 [[명나라]]에서 수입하려고 해서 사림 계열 신하들의 비판을 심하게 받는 등, 알고보면 명종도 '''[[밀덕후]]''' 기질이 있다. 그러나, 이준경, 이윤경, 한온, 변협[* 해남 현감], 김빈[* 우수사], 최인[* 진도 군수]을 제외한 지역 군수, 현감들과 일부 지도부[* 김경석·남치훈.]은 모두 도망가거나 제때 지원하지 않았고, 이 일은 명종조 조선군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1559년, 아직도 [[윤원형]]의 세가 강성할 때, 명종은 윤원형의 권세를 제약하고 싶어 했고, 아버지 [[중종(조선)|중종]]이 썼던, 신하로 신하를 제거하기로 한다. 명종은 왕비의 외숙 [[이량]]으로 윤원형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중종 때 [[김안로]]와 [[윤원형]]이 그랬던 것처럼 이량 역시 자신의 세를 불리는데 급급했고, 애초에 권신으로 권신을 제약하는 것은 제도를 등한시한 채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기대를 하면 안 되었다. 결국 이러한 명종의 계책은 실패하고, 이량은 [[심의겸]]을 탄핵하려다 본인이 탄핵당한다.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명종은 [[윤원형]] 일파를 모두 숙청하고 억불 정책에 돌입하는 등 [[정치]]를 안정시키나, 1567년 명종도 34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자신의 정치는 물론, 후사를 구상하기에도 너무 짧은 2년이었다.[* 승하하기 전부터 유성이 떨어지는 등 갖은 징조가 있었다. 시약청을 설치하자마자 다음 날 새벽에 훙했다. 워낙 갑작스럽게 승하한터라, 대신들은 물론 어의들도 제대로 병석에 입시하지 못해 우왕좌왕하였다. [[명종실록]]의 이 부분을 보면 사관의 신랄한 비판이 가득하다.] 한편, 계속된 사화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지방에서 힘을 기르던 [[사림파|사림]]은, [[문정왕후]]와 [[윤원형]] 등의 척신들이 자리를 비우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때는 [[성종(조선)|성종]] 때처럼 [[훈구파]]도, [[연산군]] 때처럼 반사림적인 임금도, [[진성대군|중종]] 때처럼 신진 사림을 제어할 세력[* 남곤 등 도학파, 정국공신, [[김안로]].]도 없었기에, 그야말로 순수 지방 사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렇게 조정을 가득 채운 사림은 [[조광조]] 일파처럼 왕도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고, 자연스레 [[성종(조선)|성종]] 시절 [[대간]]의 따박따박이 부활하게 되었으므로, 명종은 이래저래 힘을 쓸 수 없었다. 교과서나 일반적인 서적에는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명종은 그것을 지원했다"는 식으로 나와있지만, 그것이 명종 자신의 색깔인지, 아니면 주위에 휘둘린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례로, 당시 관료들은 "진정한 [[현자]]를 등용하면 나라가 안정될 것"이라고 보고 대학자 [[이황]]을 등용하기를 줄기차게 간청했는데, 나중에는 "뭐 적당한 자리 있음 알아보든가"라는 식으로 나왔다고 한다. 다만 나중에는 '현자를 초대하나 오지를 않는구나'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라고 한 적이 있다. 불러도 오지 않는 이황에 대한 섭섭함은, 사림에 대한 우호적 태도로 볼 여지가 있다. == 가족 == 왕비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외아들 [[순회세자]]를 낳았지만, 순회세자는 명종 18년(1563)에 중병에 걸려 14살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이로 인해 조선 왕실의 적통 직계는 명종의 대에서 끊겼다.[* 조선 왕실 적통은 [[이성계|태조]]에서 시작해 [[이방원|태종]], [[세종대왕|세종]]을 거쳐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세조]]가 이어갔고, 세조의 적통은 [[자을산군|성종]]이 이어갔고 성종의 대는 [[진성대군|중종]]과 명종으로 이어졌지만,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의 요절로 인해 적통 직계는 명종에서 끊겼다.] 그리하여 차기 왕은 중종의 7남 [[덕흥대원군|덕흥군]](훗날의 덕흥대원군)[* [[덕흥대원군]]의 생모는 [[창빈 안씨]]. 생전의 군호는 덕흥군(德興君)이고 '대원군' 칭호는 [[하성군|선조]] 2년(1569)에 선조가 생부를 추증한 것이다.]의 3남이자, 명종 입장에선 조카인 하성군이 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어 조선 14대 임금 [[선조(조선)|선조]]가 되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태조-태종-세종-세조-성종-중종 순.] 명종은 외아들 순회세자가 죽은 뒤 다시 아들을 보기 위해 노력했는데, 꿈 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어느 여자를 얻으면 아들을 볼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그 여자를 [[후궁]]으로 삼았지만, 끝내 아들을 보지 못했다. 명종은 생전에 [[선조(조선)|하성군]]을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확정하지는 않았으나 묵시적인 동의 정도는 한 것으로 추정한다. 명종은 일찍부터 하성군을 비롯한 덕흥군의 아들들을 수시로 궁에 불러 만나며 관계를 쌓아갔다. 또한 1565년(명종 20년) 9월에 명종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이준경은 후계자 문제를 거론했다. [[인순왕후]] 심씨는 평소 명종이 아끼던 [[하성군]]을 불러다가 병간호를 맡겼는데, 본래 국왕의 간호는 왕세자에게 맡겼으므로 이는 사실상 하성군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본래 이렇게 후계자를 선정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고, [[조선시대]]에는 신하들이 멋대로 후계자를 선정하는 것은, 자칫하면 '택군'이라 하여 역모에 준하는 중죄로 취급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명종은 의식을 회복한 뒤에도 딱히 이를 문제삼지 않았고, 이준경 등이 후계자 문제를 또 거론했을 때도 "당장 결정할 일이 아니다"라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를 볼 때 명종 역시 [[하성군]]의 계승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하성군으로 확실하게 공인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는 불확실하다. 단순히 공인할 시기를 놓쳤을 뿐인지, 아니면 하성군의 계승 자체는 인정하되 '혹시라도 세자가 새로 태어날 수 있으니 좀 더 기다려 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하성군으로 하자'라는 차선책의 일환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명종의 나이가 30대 중반에 불과했으니 세자가 태어나길 기대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긴 하다. 이후 명종이 사망하기 직전, 이준경이 후계자를 누구로 할 지 묻자, [[인순왕후]]는 '을축년에 결정한 대로 한다'라며 [[하성군]]으로 후계자를 최종 결정했다. 이때 명종은 이미 병세가 깊어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인순왕후가 결정한 것이다. 여기서 인순왕후가 말한 '을축년의 결정'은 앞서 말한 하성군이 병간호를 했을 때를 말한다. 즉 인순왕후 또한 그 일을 계기로 이미 하성군이 후계자로 인정을 받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하들 또한 하성군의 승계에 대해선 큰 반발이 없이 순순히 수용했다. 또한 마침 하성군의 친부인 [[덕흥군]]은 일찍 사망했고 친모인 하동부대부인 정씨 역시 하성군이 공식 즉위하기 1달 전에 이미 사망했다. 게다가 정씨의 친정, 즉 하성군의 외가 역시 권세가 큰 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척신들이 딱히 발호할 여지도 적었기 때문에 하성군에 대한 반발도 크지 않았던 것.[* [[맹꽁이 서당]]에도 나온 얘기지만 야사에서는 이준경이 (대비나 원로 대신들과 논의 후) 이 과정에서 총대를 메고 일종의 쇼를 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미 승하한 명종의 곁에 다가가 마치 아직 살아있는 것으로 위장하면서 "신은 이미 늙어 귀가 안 들리니, 가까이서 옥음을 직접 듣겠습니다"라는 시늉을 했고 사전에 입맞춘 "하성군으로 보위를 잇겠다"는 전교를 내린다.] 여담으로 [[순회세자]]의 정실 [[공회빈 윤씨]]는 남편이 가례를 올린 지 2년 만에 죽어, 그 후 30여 년을 청상과부로 살아야 했다. 윤씨는 [[임진왜란]] 직전인 1592년 임진년 3월 3일 죽어 남편과 함께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경역 내에 위치한 순창원(順昌園)에 묻힐 예정이었지만, 그해 4월 말 왜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제대로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어가가 [[한양]]을 버리고 피난 가다가 벽제관 이르렀을 때에야 '덕빈의 시신을 후원에 임시로 가매장하라.'는 전갈을 보내었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왔을 때, 왜군에 의해 가매장한 무덤은 파헤쳐졌고 시신은 없었는데, 궁궐이 불에 탔을 때 같이 타버린 듯하다. 또 [[병자호란]] 때는 [[종묘]]에 있던 신주마저 없어진 불행한 여인이었다. 가족은 아니지만 [[정철]]과는 어린 시절 친구였다. 하지만 정철의 꼬장꼬장한 성격 때문에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정철의 집안은, 정철 본인의 누이가 명종의 형 [[인종(조선)|인종]]의 [[후궁]] 중 한 명인 귀인 정씨일 정도로 권세 있는 집안이다.] == 평가 == 명종은 [[조선]]의 정식 국왕 중 [[정종(조선)|재]][[문종(조선)|위]][[예종(조선)|기]][[인종(조선)|간]][[경종(조선)|이]] 짧거나 [[단종(조선)|쫓]][[연산군|겨]][[광해군|난]] 임금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종묘 정전(正殿)에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지지 못한 왕이기도 하다. 대신 한 단계 급이 낮은 영녕전(永寧殿) 동협에 위패가 [[경종(조선)|경종]][* 재위 기간이 4년밖에 안 되고, 자식이 없어 왕위는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에게 넘어갔다.], 추촌왕인 [[정원군|원종]][* 원래는 정원대원군으로 부르는게 맞았으나, 인조가 무리수를 두면서 왕으로 추존했다.], [[효장세자|진종]], [[사도세자|장조]], 그리고 [[영친왕|의민태자]]와 함께 있다. 22년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동안 왕위에 있었는데도 심지어 추존왕인 [[효명세자|문조]](효명세자)나 망국의 군주인 [[순종(대한제국)|순종]]에게도 밀리는[* 다만 본래 정전에는 현 왕의 5대조까지는 모셔둔다.] 등 존재감이 없다. 원래 위패를 옮기지 않고 매년 [[제사]]를 모시는 [[불천위]]는[* [[퇴계 이황]] 종가는 놀랍게도 500년(!)이 지난 지금도 퇴계의 제사를 모신다. 사실 [[경상북도]] [[안동시]]에는 그런 [[불천위]] 제사가 한두 건이 아니다.] 신하들이 "☆☆대왕께오서는 나라에 큰 공이 있으므로 정전에 불천위로 모시옵소서."라고 주창하고, 왕이 이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결정하는데, 다르게 말하면 명종이 후대의 신하들이나 임금에게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임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게 왜 문제냐면 명종 시절에도 [[을묘왜변]]이라는 (당시로서는) 대형 침공이 있었다. 굳이 불천위로 모시자면 이걸 가지고 밀어붙이면 되는데 안 했다는 건 진짜 인정을 못 받았다는 거다. 다른 왕들의 경우엔 어떻게 해서든지 무슨 핑계를 써가지고 불천위에 모시는 것과 비교해보면 판이한 부분.] [[2010년대]]에야 드러나는 인식은 '''"어쩌면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실정이라고 간주한 것이 사실은 명종이 방치, 동조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어머니 문정왕후와 외삼촌 윤원형 쉴드로 잊혀진 진정한 [[암군]]이 아니었느냐는 것. 명종이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다 싶을 때쯤 승하해버렸기 때문에 확실히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1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친정을 했으며, 건강 문제도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나 생긴 점 등으로 보아, 사관들이 명종의 실정을 직접 공격하긴 곤란해서 행실이 좋지 못했던 문정왕후와 윤원형에게 명종의 실정까지 모조리 떠넘겨 버렸을 가능성도 생각보다 높다. [[종묘]]에서의 대접을 생각해 보면, 당대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리 좋은 임금으로 기억되지는 못했던 듯. 남긴 행적만 봤을 때도 괜찮은 왕이었다고 여길만한 실적도 거의 없다. == 능 == [[파일:강릉.jpg]] 능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강릉(조선 명종)|강릉]](康陵)으로, 중전 [[인순왕후]] 심씨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자세한 것은 강릉 항목 참고. ==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 [[임꺽정(드라마)|임꺽정]]에서는 [[이효정]]이 그 역을 맡았다. 당시에 이효정 씨는 30대 중반이었는데 극중 명종은 20대 후반이므로 [[노안]]이다. 재미있는 건 동생인 [[이기영(배우)|이기영]]이 임꺽정패의 두령 중 하나인 [[배돌석]]을 맡았는데, 극중 배돌석은 명종보다 무려 10살이 많다는 것. 초반애는 어린애로 문정왕후의 매를 맞는 안습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 임꺽정이 유명해지자 가끔씩 나오다가, 최종 등장은 남치근을 토포사로 임명한 것. --임꺽정의 천하통일을 꿈꾸었을 몇몇 어린애들에게는 최종보스-- * [[신상옥]] 감독의 영화 [[내시]]에서는 [[후궁]]을 밤마다 갈아치우고 '''[[경복궁]] 지하에 고문실을 운영하는''' [[변태]] 폭군으로 나온다. 배우는 [[남궁원]]. 역사 고증과 무관한데 '''대비가 고승이랑 가까웠다'''는 설정과 대비와 주상이 '''억울한 선비들을 도륙했다'''는 설정 및 '''갑자기 죽어서 세자 없이 다른 종손이 이었다'''는 설정을 넣기 위해서 일부러 명종으로 하였다. * 남궁원이 내시감으로 나온 이두용 감독의 리메이크에서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명종이 아닌 가상의 조선 왕 [[길용우]]로 설정한다. * [[이병훈(PD)|이병훈]] PD 연출작 [[옥중화]]에서는 [[서하준]]이 명종 역으로 나온다. 여기서는 그나마 멀쩡하게(?) 나온다. *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야인시대]]에서 [[박용직]] 역을 맡은 배우 홍륜의가 명종 역을 맡았다. * [[여인천하]] 최종화에서 [[김광영(배우)|김광영]]이 성인이 된 명종 역을 맡았다.[* 김광영은 이후 [[임진왜란 1592]]에서 명종의 양자 [[선조(조선)|선조]]를 연기한다.] * [[대장금]]에서는 왕자 시절에 [[천연두]]에 걸렸을 때와 생일잔치 날에 잠깐 얼굴을 비치고 최종화에서는 왕이 돼서 등장. 아직 어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덕분에 문정왕후가 왕을 구하지 못한 책임 때문에 도망자 신세였던 대장금 일가를 구해 줄 수 있었다. * 대체역사물 <여왕전하의 비선실세>에서는 주인공이 포함된 [[잉글랜드]] 사신단을 맞이해 [[임꺽정]] 토벌을 한 것을 치하하고, 조선 [[청자]]와 [[산삼]]을 구해주며, 그와 동시에 [[동래]]에서 1년에 1번 무역선이 와서 교역하는 걸 허가했으며, [[명나라]]에 대한 조공사신이라는 증서를 발급해준다.[* 이 시기의 조공은 공무역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이율곡]]이 포함된 사신단을 [[잉글랜드]]로 보낸다. 이를 통해 후일의 조선사에 영향을 끼칠지가 주목되는 요소. == 같이보기 == * [[경국대전주해]] * [[명종실록]] * [[속무정보감]] == 명종조 인물 == * [[문정왕후]] * [[윤원형]] * [[이기]] * [[허자]] * 최보한 * 임백령 * 정언각 * [[이량]] * [[이황]] * [[조식(조선)|조식]] * [[이언적]] * [[임꺽정]] * [[정난정]]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명종, version=106)] [[분류:1534년 출생]][[분류:1567년 사망]][[분류:조선의 대군]][[분류:조선 국왕]][[분류:종로구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