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Rudolf Hiden.jpg]] || 이름 || 루돌프 하이덴[br](Rudolf Hiden[* [[프랑스어]] 표기로는 Rodolphe Hiden이고 영어 위키피디아에도 이렇게 표기되어 있다. 풀네임이 요제프 루돌프 하이덴(Josef Rudolf Hiden)이라는 기록도 있다.]) || || 생년월일 || [[1909년]] [[3월 9일]] || || 사망년월일 || [[1973년]] [[9월 11일]] || || 국적 ||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width=28]] [[오스트리아]] || || 출신지 || [[그라츠]] || || 포지션 || 골키퍼 || || 신체조건 || 184cm / 82kg || || 등번호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소속팀 || 비너 AC (1927-1933)[br][[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RC 프랑스]] (1933-1940) || || 국가대표 || 20경기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오스트리아]] / 1928-1933)[br]1경기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 1940) || || 감독 || [[US 살레르니타나]] (1951-1952)[br]ACR 메시나 (1952-1953)[br][[SSD 팔레르모]] (1953-1954)[br]카라레제 칼초 (1954-1955)[br]ACR 메시나 (1956-1957)[br]US 살레르니타나 (1963-1964) || [목차] == 생애[*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 === 선수 생활 === ==== 클럽 ==== [[그라츠]]의 [[제과점]] 견습생이던 루디[* 루돌프의 애칭. 루디라고도 많이 불렸다.] 하이덴은 16살의 나이에 그라처 AC(Grazer AC) 유스팀에 입단하자마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에는 골키퍼와 센터 포워드로 뛰었으며 18살 때 비너 AC로 500 [[오스트리아 실링|실링]]에 이적했다. 하이덴은 비너 AC에서 성인팀에 데뷔했고 곧 팀의 중요한 선수로 입지를 다졌다. 그와 함께 비너 AC는 1930년대 강팀으로 발돋움했다. 데뷔 시즌부터 ÖFB-컵 준우승을 차지했고 1931년에는 ÖFB-컵 대회 우승과 미트로파 컵 준우승의 성과를 올렸다. 오스트리아 최고의 골키퍼이자 분더팀의 주전 골키퍼답게 하이덴은 뛰어난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외국의 클럽들도 그의 활약에 주목했다. 하이덴의 활약을 지켜본 [[아스날 FC|아스날]]은 1930년부터 하이덴을 영입하려 공을 들였지만 잉글랜드 축구계의 빡빡한 워크 퍼밋이 발목을 잡았고 아스날 이적은 무산되었다. 하이덴은 결국 1933년 프랑스의 [[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RC 프랑스]]에 8만 [[프랑스 프랑|프랑]]의 이적료로 이적했다. 프랑스에서의 첫 시즌은 11위라는 다소 실망스런 성적으로 마쳤고 이듬해엔 28경기에 출전하며 3위로 팀 순위를 끌어올렸다. 1935-36시즌의 RC 프랑스는 프랑스 축구 역사상 2번째[* 프랑스의 첫 더블은 1933-34시즌의 FC 세트가 기록했다.]로 [[더블#s-7]]을 기록했고 그 이후에도 1939년과 1940년의 2년 연속 [[쿠프 드 프랑스|컵대회]] 우승에도 기여했다. ==== 국가대표 ==== 하이덴은 19세 되던 해인 1928년에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대표팀]]에 선발되기 시작했다. 그의 데뷔전 상대는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였고 오스트리아는 3대0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하이덴은 첫 경기부터 [[클린시트]]를 기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대표팀 감독 [[후고 마이슬]]은 이후 2년간 하이덴을 대표팀에 선발하지 않았고 1930년 3월, 하이덴은 [[체코 축구 국가대표팀|체코슬로바키아]]와 2번째 시합을 치렀다. 이 [[프라하]] 원정 경기에서 오스트리아는 체코슬로바키아와 2대2로 비겼지만 하이덴은 뛰어난 퍼포먼스로 눈도장이 찍혔다. 다음 A매치인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전에서 오스트리아는 0대0으로 비겼지만 인상적인 세이브로 [[프리드리히 프란츨|프란츨]] 등을 밀어내고 21살에 대표팀 주전 골키퍼가 되었고 오스트리아는 1931년부터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분더팀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이덴 역시 대표팀의 골문을 든든히 지키며 전력에 큰 보탬이 되었고 1932년의 [[스탬퍼드 브리지]] 원정 경기에서 잉글랜드와 호각으로 싸우며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했다. 1933년 2월, 프랑스 원정 경기에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를 [[마티아스 신델라|신델라]], [[카를 치셰크|치셰크]], [[토니 샬|샬]] 등의 골을 앞세워 4대0으로 대파했는데 하이덴은 그의 국가대표 커리어에서 최고로 꼽힐 만한 활약으로 프랑스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이 활약으로 하이덴은 [[리그 1|프랑스 디비지옹 1]]으로 이적할 수 있었다. 1937년에 하이덴은 프랑스 [[귀화|시민권을 취득]]했고 [[프랑스 축구 연맹]]은 끊임없이 하이덴이 프랑스 대표팀에서 뛰도록 설득했다. 결국 하이덴은 1940년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포르투갈]]을 상대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프랑스 대표팀 경기를 치렀고 경기는 프랑스가 3대2로 이겼다. === 이후 ===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 이탈리아에서 여러 팀의 감독을 맡기도 하고 여러 사업을 시도했지만 손 대는 사업마다 망해버리는 바람에 돈을 모으는데는 실패했다. 프랑스에서 선수로 활약할 때부터 [[바(술집)|바]]를 운영하며 자신의 돈을 거의 다 투자했지만 바가 망하는 바람에 큰 경제적 위기를 겪었다. 1962년 오스트리아에 돌아와서 [[호텔리어]]로 일하며 [[탁구]], 미니 골프, [[배드민턴]], 프랑스식 볼링 등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펜션]]을 차렸지만 이 또한 망하며 다시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로 건너가 바를 경영했다. 하지만 연속된 사업 실패의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었는지 [[암]]에 걸렸고 1968년에 다시 오스트리아에 돌아왔다. 1970년 무렵엔 전 소속팀 비너 AC에서 하이덴을 위해 3천 실링을 모금하여 전달했고 아파트 마련에도 도움을 주었다. 이런 도움에도 불구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1972년 그는 결국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고 1973년 그가 사망했을 때 [[빈(오스트리아)|빈]]에선 거의 잊힌 이름이 되었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빠르고 용감한 골키퍼. 다소 상대 공격수에게 호전적인 성향도 갖고 있어서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리카르도 사모라|사모라]], [[잔피에로 콤비|콤비]],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플라니치카]], [[빌리발트 크레스|크레스]] 등과 1930년대 유럽 최고를 다투던 골키퍼. 오스트리아 역대 최고의 골키퍼를 뽑을 때도 1950년대에 활약했던 대표팀 후배 [[발터 제만]]과 항상 이름을 올린다. 하지만 하이덴은 [[FIFA 월드컵|월드컵]]에서 단 1분도 활약을 못해 평가에서 다소 손해를 보는 면도 있다. == 뒷이야기 == * 하이덴은 다른 축구 선수들과 다르게 여성 팬층이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 1940년 하이덴이 프랑스 대표팀으로 유일하게 활약한 경기에서 그와 같이 뛴 대표팀 멤버 중 오스트리아 출신인 소속팀 동료가 2명 더 있었다. == 수상 == === 클럽 === * [[리그 1|디비지옹 1]] 우승 1회: 1935-36([[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RC 프랑스]]) * ÖFB-컵 우승 1회: 1930-31(비너 AC) * [[쿠프 드 프랑스]] 우승 3회: 1936, 1939, 1940(RC 프랑스) * ÖFB-컵 준우승 2회: 1927-28, 1931-32(비너 AC) * 미트로파 컵 준우승 1회: 1931(비너 AC) === 국가대표 === * 중유럽 컵 우승 1회: 1931-32 [각주] [[분류:1909년 출생]][[분류:1973년 사망]][[분류:오스트리아의 축구선수]][[분류: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은퇴, 이적]][[분류:오스트리아의 축구감독]][[분류:US 살레르니타나/역대 감독]][[분류:ACR 메시나/역대 감독]][[분류:SSD 팔레르모/역대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