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bgcolor=#75aadb><color=#373a3c> '''[[아르헨티나 대통령|{{{#ffffff,#191919 아르헨티나 대통령}}}]]''' || ||<-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Standard_of_the_President_of_Argentina.svg.png|width=250]] || ||<width=30%> 43대 || {{{+1 → }}} ||<width=30%> 44대 || {{{+1 → }}} ||<width=30%> 45대 || ||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 || {{{+1 → }}} || '''레오폴도 갈티에리''' || {{{+1 → }}} || [[레이날도 비그노네]] || ||<-2><tablealign=center><tablewidth=550><tablebordercolor=#79aee0><bgcolor=#79aee0><color=#373a3c>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9AEE0 0%, #84BAED 20%, #84BAED 80%, #79AEE0);" ''' {{{#ffffff,#191919 아르헨티나 제44대 대통령}}} [br] {{{#ffffff,#191919 {{{-1 Excelentísimo Señor}}}}}}[br] {{{#ffffff,#191919 {{{+1 Leopoldo Fortunato Galtieri Castelli}}} }}}'''}}}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레오폴도갈티에리.jpg|width=100%]]}}} || ||<colcolor=#373a3c><colbgcolor=#75aadb> '''{{{#ffffff,#191919 본명}}}''' ||<bgcolor=#ffffff,#191919>Leopoldo Fortunato Galtieri Castelli [br] 레오폴도 포르투나토 갈티에리 카스테이 || ||<|2> '''{{{#ffffff,#191919 출생}}}''' ||<bgcolor=#ffffff,#191919>[[1926년]] [[7월 15일]] || ||<bgcolor=#ffffff,#191919>[[아르헨티나]] 카세로스 || ||<|2> '''{{{#ffffff,#191919 사망}}}''' ||<bgcolor=#ffffff,#191919>[[2003년]] [[1월 12일]] || ||<bgcolor=#ffffff,#191919>[[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 || '''{{{#ffffff,#191919 국적}}}''' ||<bgcolor=#ffffff,#191919>[[아르헨티나]]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width=28]] || ||<|2> '''{{{#ffffff,#191919 임기}}}''' ||제44대 대통령 || ||<colbgcolor=#ffffff,#191919>[[1981년]] [[12월 22일]] – [[1982년]] [[6월 18일]] || || '''{{{#ffffff,#191919 정당}}}''' ||[include(틀:무소속)] || || '''{{{#ffffff,#191919 배우자}}}''' ||루시아 노에미 젠틸리 || [목차] == 개요 == [[아르헨티나]] [[육군]] [[장교]] 출신으로, 군부 독재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에 참여하여 [[후안 페론]] 정권을 뒤엎고 군의 실세가 되었고 결국 [[아르헨티나 대통령|대통령]]까지 된 [[독재자]]. 국민의 관심을 돌리고자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지만, 영국의 역습으로 아르헨티나가 패배하자 몰락했다. == 군사 독재 == 갈티에리는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군사학교를 졸업한 이후 오랫동안 육군에서 생활했다. 1976년 비델라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에 참여하여 페론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고, 그는 군사정권의 주요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도입하여 외자 유치를 실행했지만, 이게 너무 과도하게 받아들여서 경제는 점점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또한 군부독재가 펼쳐질 당시에는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수많은 실종사건 등 이른바 [[더러운 전쟁]]으로 불린 인권탄압을 자행했다. 1981년 11월 대통령이 된 갈티에리 장군은 다른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자행했는데 대표적으로 한 일이 민주화인사, 야당 정치인들을 [[공군]] [[수송기]]에 태운 뒤 [[비행기]] 안에서 [[마약]]을 잔뜩 투약시켜 환각상태로 만들고 [[대서양]]에다 떨궈놓는 짓(이른바 죽음의 비행)을 했다. 이건 이전 통치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써먹은 적이 있고, 시초는 [[허를러깅 처이발상]] 전 [[몽골]] 수상의 [[사막]] 투하였다. == 포클랜드 전쟁과 패배 == [[파일:external/viceland-assets-cdn.vice.com/20080612klphishar_27_ies_sco.jpg]] ~~포클랜드~~말비나스 '수복' 직후, 군중들의 환호에 답례하는 갈티에리. 그러던 중 갈티에리는 대통령 자리에 오른 지 불과 6개월 만에 군사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를 높일 목적으로 아르헨티나 연안에서 563㎞ 떨어진 포클랜드 섬을 공격하도록 군대에 명령했는데 갈티에리는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물려받은 남대서양의 이 섬을 [[영국]]으로부터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그리고 이것이 바로 [[포클랜드 전쟁]]의 시작이였다.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전쟁을 강행한 이유는 [[미국]] [[연준]]의 고금리 정책으로 심각한 경제난이 일어났고 민심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었다. 더불어 오랫동안 군부 독재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납치하고, 고문하고, 살해하는 등의 이른바 [[더러운 전쟁]]을 저지르면서 국민들은 군부에 염증을 냈다. 1980년에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Roberto Eduardo Viola) 장군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나 상황은 더욱 나빠져서 고작 2년도 되지 않아 1981년 12월 대통령직이 갈티에리에게 넘어왔던 것이다. 게다가 엎친 데 겹친 격으로 국내에서 반군부 민주화 운동 등이 거세게 일어나자, 고유영토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포클랜드를 점령하면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여 불안한 국내정세까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파일:external/estaticos01.elmundo.es/1199970104_0.jpg]] [[해군참모총장]] 아나야 [[제독]](왼쪽 흰 [[정복(의복)|정복]])과 함께. 이에 정권의 핵심세력 중 당시 해군참모총장인 [[해군]][[중장]] 호르헤 아나야(Jorge Isaac Anaya) 제독은 포클랜드 침공을 제안했다. 아나야 제독은 나름대로 정교한 전략을 짠 뒤 갈티에리에게 보고하면서 무력 점령을 하더라도 영국 본토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 제도를 되찾기 위해 반격할 의지가 없을 것이라 주장했고, 만에 하나 영국이 반격을 해온다 하더라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수송할 병력의 숫자는 물론 전투기 등 무기의 양도 한정적일 수 밖에 없어서 실제 전장에서의 군사력은 아르헨티나가 앞설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나야 제독의 논지와는 정반대로 영국의 [[마가렛 대처]] 총리는 머리끝까지 화를 내며 포클랜드 제도 탈환을 지시했고, 그렇게 맞붙은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는 첨단 무기와 높은 사기로 무장한 영국에 완벽하게 패배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수송할 병력의 숫자와 전투기 등 무기의 양이 한정적이기는 커녕 영국은 [[세인트헬레나]] 섬을 전초기지로 삼아 그 곳에 엄청난 물자를 쌓아놓고 무기와 보급의 양을 탄탄하게 했다. 이로 인해 갈티에리는 결국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갈티에리는 자국 국민들에게는 [[언론통제]]를 통해 포클랜드 전쟁에서 이겼다고 거짓말을 해대가면서 버텼지만,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단에 의해서 패전 사실이 들통났다. == 말년 == 결국 1982년 6월 17일 갈티에리는 대통령직과 3인 군사평의회 의장 및 육군사령관직에서 사임했다. 갈티에리는 아르헨티나 군부의 지지부족으로 현직을 수행할 수가 없어 대통령직과 육군총사령관직에서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퇴임 이후에는 일단 [[레이날도 비뇨네]]를 후임 대통령으로 하여 군사독재정권을 어떻게든 유지시키려 했으나 이마저 얼마 못가고 결국 이듬해 말인 [[1983년]] [[12월 10일]] [[라울 알폰신]]이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서 결국 [[호르헤 비델라]]에서 시작한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정권은 그 막을 내렸다. 결국 갈티에리는 일단 나부터 살자는 심산으로 이미 대통령이 된 라울 알폰신과의 협약으로 자신이 사법적으로 심판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알폰신 대통령은 [[뒤통수]]를 치며 군부의 핵심들을 모조리 감옥에 넣어버렸다. 갈티에리는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전쟁 책임으로 인해 수감됐으나,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에 의해 풀려났다. 2002년에는 군부 독재시절의 의문사, 살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확인되어 결국 20명의 좌익 게릴라들을 납치해 고문하고 처형하는 데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고령인데다가 췌장암을 앓고 있어 연금 조치만 내려졌다. 평소에도 [[췌장암]]을 앓아온 갈티에리는 증세가 악화되자 아르헨티나군 중앙병원에 입원했고, 결국 2003년 1월 12일 77세로 [[사망]]했다. [[분류:아르헨티나 대통령]][[분류:아메리카의 독재자]][[분류:1926년 출생]][[분류:2003년 사망]][[분류:췌장암으로 죽은 인물]][[분류:군인 출신 정치인]]